일기를 부탁해

by 새해

일기 속 나는 항상 우울하고 화가 나있다. 왜냐면 우울하고 화가 날 때만 일기를 쓰기 때문이다. 일기를 자주 썼다면 그 시절은 고난이 많았음을 의미하고 몇 년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한 달 치 밀린 일기를 쓰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진짜 일기를 쓰게 된 것은 아마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나름 문학소녀였는데 국어 선생님이 전국 백일장 학교대표로 다른 친구를 추천했다. 그때였다. 크눌프처럼 하느님께 징징거리기 시작한 것도, 비밀 일기를 쓰게 된 것도.


그때였어요. 제가 열네 살이고 프란치스카가 절 버리고 떠나버렸던 그때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전 여전히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제 안의 무엇인가가 고장 났던가 망가져버렸던 거죠. 그때부터 전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아뇨 잘못은 단지 당신께서 제가 열네 살 일 때 죽게 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어요!. 그랬다면 나의 삶은 잘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한 것이 되었을 겁니다.

(헤르만 헤세/ 크눌프/민음사)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그 감정의 깊이와 크기만큼 일기를 쓴다. 슬픔 많던 스무 살에는 일기를 몇 날 며칠 소설처럼 쓰기도 했다. 일기를 쓰다 보면 감정이 정리되고 객관화되고 이해되고 마음은 다시 평화를 얻는다. 그러면 일기를 까맣게 잊었다. 다음 고난이 올 때까지.


일기를 오래 간직하지 않는 것 또한 나의 오랜 습관이다. 강을 건넜으면 타고 온 배는 버리는 게 맞다. 일기는 내가 괴로움울 건너기 위해 타고 온 배였다. 오래된 일기장은 벌써 내다 버렸고 컴퓨터에 저장된 일기는 수시로 삭제한다. 그런데 데스크톱, 노트북, USB , 휴대폰, 저장 공간이 많아지면서 삭제되지 않은 일기가 가끔씩 튀어나온다. 예를 들면 '비둘기' 같은 엉뚱한 파일명으로.


'비둘기' 파일을 열어보니 상종 못할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나와 잘 지내고 있다. 받침도 무시하고 띄어쓰기도 무시하고 욕도 섞어가며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내 일기가 남 얘기처럼 재미있었다.


얼마 전부터 고난일기와 더불어 감사일기를 쓴다. 나이가 든다고, 체력이 좀 떨어졌다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진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감사가 많아졌다. 나는 여전히 까탈스럽고 자주 마음을 바꾸며 여전히 때때로 아군에게 폭탄을 던지는 사람이지만 하루하루 감사에 민감해지고 있다. 일기를 쓰다가 감사가 이렇게 많다니! 놀라기도 한다. 감사도 노화의 한 증상이라면 나이 들어가는 게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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