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심한 감기 몸살을 앓았다. 감기에 걸리면 종합 감기약 먹고 코 좀 흘리고 목 좀 아프다 낫는 병인줄 알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주변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이 먹어서 그래,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 , 병원 가, 병원 가서 주사 맞아!
감기 때문에 병원엘 가다니, 내 사전엔 없던 일이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고도 며칠을 더 앓았다. 모든 게 귀찮고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그깟 감기로 이렇게 드러눕다니. 이젠 감기도 그깟 감기가 아니란 말인가?
별 수 없다. 체력 관리에 신경을 써 보자! 숨쉬기 운동밖에 모르던 사람이 작년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안 먹던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음식도 가급적이면 좋아하는 것보다 좋다는 걸 먹는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수면 습관도 바꿨다. 그건 거의 천지개벽에 가까운 일이다. 조금 의심되면 병원에도 잘 간다. 특히 치과 진료는 결코 미루지 않는다. 오늘은 예방 차원에서 치과를 다녀왔다.
치과 진료 의자에 누우면 자동반사적으로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서른 중반, 일 말고 다른 즐거움이 없던 시절, 치과 치료 기간 중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출장 다녀오면 바로, 꼭, 치과에 와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몇 번이나 당부했다. 네! 네! 대답을 잘하고 2주간 해외 출장을 다녀왔는데 치료 중이던 이가 아프지 않았다. 예약을 잊었고 , 전화를 무시했고, 치과 갈 시간에 일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다시 치과 진료의자에 누웠다. 눈물이 났다. 그 치과는 내가 다니던 한미 치과가 아니고 길 건너 성모 치과였다. 창피하고 미안해서 한미 치과로 가지 못하고 다른 치과로 간 것이다. 새로 씌운 이를 벗겨 내고 또다시 씌우는 중이었다.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고 힘들고 아프고 무엇보다 내가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얼굴을 가려 주는 안면 가리개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어렵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 없듯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않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 지난 어떤 시간을 생각하면 과연 그게 나였나? 싶을 만큼. 그러나 그럼에도 변함없이 나를 지탱해 온 그때도 나고, 지금도 나고, 나는 얼마나 많은 나로 이루어졌는가? 치과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라디오 속에 작은 사람이 산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다섯 살, 거창한 꿈 때문에 방황하고 좌절했던 스물다섯, 열정은 있고 균형이 없던 서른여섯, 서울을 떠나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나? 평화를 의심하던 마흔넷, 늙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된 쉰넷, 순응이란 걸 실천하고 있는 예순셋,
내가 걸어온 한걸음 한걸음은 모두 내가 선택해 온 거야. 그 선택이 나의 애정이나 의지를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했고 때로는 나의 의사에 반하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내 인생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니까. -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 호우잉/ 다섯 수레 -
그 많은 우연과 곡절과 선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오늘의 생각과 행동으로 다시 일흔이 되고 여든도 되겠지? 줄기차게 계획이 어긋나고 존재가 총체적으로 허무하다 해도, 받아들이고, 고치고, 오늘도 오늘을 공들여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