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마지막날인데도 이웃집의 성질 급한 장미는 한두송이 벌써 꽃피기 시작했다. 우리 집도 장미꽃이 언제 피려나 두근거리며 지켜보는데, 여기저기 장미 꽃봉이 빵빵하게 부풀면서 은근하게 장미 색이 비춰 보이는 수준이었다. 비가 오니 장미의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꽃대에 진딧물이 삼삼오오 붙어있기도 했다.장미 뒤에 있는 단풍나무가 급성장을 해서 그늘이 크게 생겼다. 그늘져서 햇볕을 못 받으니 보라 장미가 웃자라고, 뒤에 심은 델피니움까지 괴이한 모양으로 목을 쭉 빼고 웃자라기 시작했다. 단풍나무를 급하게 가지치기해서 빛을 확보해줬다. 장미는 이런 급한 가드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작은 꽃봉을 부풀릴 뿐이었다.
소중한 첫 장미 꽃봉
비에 끊어진 소중한 장미가지를 버리지 않고, 끊어서 근처 땅에 꽂았다. 어떤 장미인지 잊어버릴게 분명하니 원래 장미 뒤에다가 꽂았다. 내친 김에 수국, 목수국, 국화 가지도 땅에 틈틈히 꽂고, 라일락과 매자나무도 가지치기를 왕창해서 스티로폼상자 한가득 꽂았다. 산책하다 주어온 굵은 무화과나무도 줄기도 함께 꽂았다. 아직 봄기운을 붙잡았다. 한달 전에 해놓은 해놓은 로즈마리 흙꽂이는 땅에 옮겨 심었다. 몇 주전에 뿌린 설악초도 새싹이 단단해 보이는 떡잎이 되어 올라왔다. 소중히 한 곳으로 몰아줬다. 잊고 있던 적금을 타는 것처럼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새생명으로 다가올 때마다 감사하고 정원은 또 다른 아룸다운 생명으로 채워져간다.
흙꽂이와 소중한 싹들
우리 집 뒷편 그늘진 남향 화단에는 회양목을 십여그루 심었다. 회양목은 길에 많이 심어놓을 정도로 잘 자라는 종류인데, 이사온 첫 해부터 두세그루 씩 뿌리가 죽어서 바로 뽑힐 정도로 죽기 시작했다. 다른 집에서 싱싱한 회양목을 십여그루 얻어와서 중간중간 채워서 더 심었는 데도 잘 크지를 못하고 삐죽거리는 못난 모습으로병충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 뒷편이어서 신경을 못 쓰고, 나무 사이사이 땅에 잡초 안나게 지피식물 심을 염두만 할 뿐이었다. 결국에는 애벌레와 깍지벌레에 점령되어서 줄기만 남고 다 뜯어먹힌 지경이되었다. 한 나무당 검은 줄무늬 애벌레가 두세개씩 나왔다. 애벌레를 떼서 죽이고 농약을 쳤더니 그나마 상태가 나아졌다. 하지만 잘 자라지도 못하고 손이 자꾸 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정원 한켠에 모아 놓은 철쭉을 뒷 화단으로 옮겨 심기로 했다. 못해도 스무그루는 작업해야 해서 남편과 날을 잡아서 옮기기로 했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비가 오던 어린이날 다음날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회양목을 뽑기 시작했다. 뿌리가 은근히 깊고 넓어서 남편만이 뽑을 수 있었다. 나는 뽑힌 회양목을 카트에 담아서 철쭉이 있는 자리로 옮겼다. 잡초가 나지 말라고 뿌려놓은 돈나물이 비를 맞고 기세등등하게 자라 화단을 뒤덮고 있었다. 돈나물도 같이 뜯어냈다. 그리고 안 화단에 있던 철쭉을 캐서 뒷 화단으로 옮겼다. 철쭉이 크기가 큼에도 뿌리가 깊지 않아서 금방 뽑혔다. 호미를 들고 엉덩이 방석에 앉아서 회양목이 뽑혀나간 구덩이에 철쭉을하나씩 심었다. 철쭉잎이 앞을 보도록 돌리고 줄기를 곧게 세워놓고 뿌리를 흙으로 덮었다. 한시간 넘게 걸려서 다 심고나니 각약각색 삐죽거리고 키가 작았던 예전 회양목때 보다는 줄지어선 키큰 철쭉 군락이 훨씬 깔끔해 보였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 철쭉까지 죽어나가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만 워낙에 강한 식물이라 우리 집 한켠을 잘 지켜줄 것 같았다. 튀어나온 줄기를 잘라서 땅에 꽂고, 살충제를 뿌렸다. 내년 봄이 오면 분홍 꽃잔치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정해진 뒷 화단을 보며 처음 이사왔던 그날의 단정한 설렘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었다.
뒷 화단 비포 앤 애프터
5월도 중순을 향해 갔다. 아침마다 정원의 장미를 확인하고 까치발을 들어 분홍 장미 향을 맡아본다. 상큼한 사과향이 났다. 첫꽃이 신기해서 매일 바라보며 기다렸는데 그 첫꽃이 시들어 갔다. 진 꽃대를 잘라야 더 많은 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총 3송이의 꽃대를 잘라줬다. 이제는 새로 피어난 장미를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장미가 우수수 피어났다. 땅장미 중에 흰 장미를 제일 늦게 샀는데 제일 빨리 꽃을 보여줬다. 하얗고 동그란 컵 모양이 성스럽고 순결했다. 오랜 시간 몽우리로 애태우던 작약이 하루 만에 활짝 피어났다. 꽃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꼭 하얀 고봉 밥공기를 보는 것 같다. 꽃의 무게와 비때문에 꽃이 자꾸만 땅을 향했다. 지지대를 꽂아서 꽃을 세웠다. 그런데 자꾸 꽃이 뒤를 보니까 아쉬워서 지지대를 연신 옮겨가며 자리를 잡았다. 꼭 살아있는 꽃으로 꽂꽂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작약을 택배로 주문해서 집 안 화병에 꽃꽂이를 했는데, 땅에 뿌리박은 생화로 오래가는 꽃꽂이를 즐기다니 참 호사스러웠다. 하얀 작약 밑에 하얀장미 헤르초킨이 있어서 둘이 깔맞춤을 한 듯 어울렸다. 그 옆에는 웅장한 파스텔 기둥으로 자라난 델피니움이 솟았다. 화단 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으니 더 입체적이고 알록달록 예쁘다. 웃자란 델피니움, 키 작은 델피니움, 같은 날 심은 델피니움 모종이지만 제각각 자라났다. 작년에도 델피니움을 심었지만 정원에 태양광을 설치하는 인부가 밟아서 꽃을 딱 하루 봤는데, 올해는 오래도록 즐길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얀 작약의 꽃송이가 2층에서도 보인다. 함박꽃이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는 것 같은 과분한 꽃이다. 뒤이어 분홍 작약이 피어났지만 흰 작약의 아우라에 못 미쳤다. 장미들도 모두 깨어났다. 흰 장미와 작은 분홍장미, 기대했던 보라색 장미도 깨어났다. 보라색 장미는 꽃대가 맺혔는데 피질 않아서 매일 물시중을 들어가며 힘들게 깨웠다. 과연 겉잎은 진한 색인데 안에서 피어나는 장미 잎은 물이 들인듯 빈티지한 보라색을 하고 있었다. 다섯 종류 장미중에서 꽃이 제일 커서 사진으로 찍으면 멋있다. 제일 먼저 깨어났던 분홍 장미에 장미가 쏟아진다. 지는 장미는 잘라줘야 또 다른 장미가 핀다고 해서 많이 진 장미는 잘라줬다. 처음에는 세송이, 두번째에는 스무송이 넘게 잘라줬다. 첫해인데 이렇게 많은 꽃 선물을 주다니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물 한잔과 핸드폰을 들고 정원에 나가 사진을 찍는게 몇 주간 일상이 되었다. 벅찬 장미의 아름다움에 행복하고 그 행복감이 하루를 밝혔다. 과분한 장미가 하나둘 피어났다. 5월은 장미과 꽃들로 마음 가득 행복한 한달이었고, 핸드폰 사진첩 피드는 꽃사진으로 가득찼다.
다가오는 여름과 가을에도 계속 꽃을 보기 위해 새로운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동실을 뒤져 씨앗을 찾았다. 봄에 땅에 씨앗을 뿌리니 거의 다 죽길래, 집 안에서 키친 타월에다가 싹을 틔워다가 모종판으로 옮기니 새싹이 스무개 넘게 올라왔다. 인터넷으로 식물을 주문했다. 식물 쇼핑은 식물이다보니 특색이 있어서 식물 쇼핑몰을 이용하니 편했다. 그리고 동네 농사원에서 흙을 3포대 사왔고, 식물 모종과 화분 택배 상자가 집에 도착했다. 평일에는 이렇게 식물을 위한 모든 일들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이제 금요일 퇴근 후 주말이 되었다. 이제 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입고 있는 출근복을 갈아 입지도 않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는 채로 목장갑을 끼고 일을 시작했다. 식물이 살아있는 이 시간이 아직 모기가 없지만 날씨가 좋은 이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나는 정말 매일 식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무 묘목이 왔다. 겹벚꽃, 앵두나무, 석류나무를 샀다. 볼품없이 생겼지만 키가 크고 줄기의 둘레가 굵은게 마음에 들었다. 어떤 나무가 끝까지 우리 집에 남아서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열매를 줄까. 나무 키우기는 몇 년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목수국 화분이 자꾸 넘어졌다. 분갈이를 하려고 뽑아보니, 역시나 뿌리가 화분 안에 꽉차서 흙을 꽉 물고 있어서 속이 쏙 빠진다. 더 큰 화분으로 옮겨주고 넘어지지 않게 돌을 몇개 올렸다. 이제 안 넘어지고 상큼한 초록 꽃을 많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나머지는 주말에 날 잡아서 화분에 심고 땅에 심고 했더니 아침에 물을 줘야햐는 화분만 10개가 넘어간다. 식물 중독이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 싶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블루베리나무 까지 샀으니 진짜 뭘한건가 싶고 한심했다. 스트레스를 식물 쇼핑으로 푸는 것 같다. 그래도 주문해서 박스 속에서 먼길 왔으니 속죄하는 마음으로 엉덩이 방석을 끼고 호미를 들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시기적절하게 꽃이 진 꽃잔디 관리법을 알려줘서 꽃잔디를 잘랐다. 꽃잔디 꽃이 지면 이발하듯이 잘라줘야 오래 산다는 팁이었다. 꽃잔디를 모조리 이발하고 자른 꽃잔디가 아까워서 화분에다가 꽂았다. 뿌리가 나면 빈자리를 좀 채워볼 참이다. 앞 화단에 죽은 휴케라를 뽑고 은사초를 심었다. 과연 은사초의 은색빛이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꽃들을 받쳐주면서 화단이 전체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화분 버베나는 마술 화분의 힘을 받았는지 2차 개화를 시작하고 사탕같은 예쁜 꽃이 폈다. 꽃이 작은 일년초는 매일 들락거리는 현관 가까이에 놓고 보는 것이 즐기기 좋을 것 같다.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화단의 일년초는 백일홍이나 임파첸스 같은 좀 큰 사이즈의 꽃으로 하는게 구성에 좋을 것 같다.
버베나와 진 장미
봄꽃은 지고 서서히 여름 꽃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버들마편초 씨앗이 엄청 떨어졌는지 새싹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다. 작년에 5개로 시작해서 한 아름을 이뤘는데 올해는 거의 셀 수 없이 많이 올라오고 있어서 이웃에 나눠 주던지 해야할 정도로 많았다. 수국도 꽃망울이 잡혀서 점점 크고 있고, 목수국은 가지만 열심히 불리고 있었다. 파초와 칸나도 새싹이 돋고 잎이 열심히 휘몰아쳐 돋아나고 있었다. 가을 꽃으로 혹시 몰라 코스모스 씨앗도 좀 뿌려두었다. 올라오면 보는 거고 아니면 그냥 씨앗을 잃을 것이다. 국화는 작년 새싹을 열심히 삽목했는데 거의 살았다. 뿌리나누기도 했는데 잎이 조금씩 돋고 있다. 과연 지금 시작해서 가을에 꽃을 볼 수 있을까 싶지만 손가락으로 집어보니 5개월여 남았는데 못 클까 싶다. 라벤더도 심었다.
장미와 함께한 5월이었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취해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행복으로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고 행복한지 항상 의아했다. 일년에 딱 한달이기에 그 자체로 소중했고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지만 그 자체로 매일을 누리고 즐겨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장미가 다한 5월이 그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