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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Dec 09. 2020

[초단편픽션#1] 각자의 세진

 오늘도 햇빛 잘 드는 곳에 화분을 옮겼다. 어느새 올리브 나무의 가지는 화분의 두 배 이상의 크기로 뻗어나갔다. 올리브나무를 택배로 받은 건 지난해였다. 세진의 장례를 마치고 일주일쯤 지나서 화분만 덩그러니 도착했다. 어떤 편지도 없었다. 세진의 유언에 따라 화분이 내게 돌아왔다. 3년 전 10cm 남짓했던 올리브나무는 족히 3배는 자라 있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고등학교 때 세진은 평범한 친구였다. 얌전한 성격에 공부도 적당히, 1과 2와 3을 고루 갖춘 성적표를 받는 학생이었다. 딱히 튀지 않는 그에게 먼저 다가간 건 나였다. 까불거리는 나와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며 느릿한 말투를 갖춘 세진은 잘 맞았다. 우연히 짝이 된 계기로 우린 서로를 절친이라 부르는 데 망설임 없는 사이가 됐다. 둘만으로 충분했다. 나와 세진은 공부하기 바빴고 그중 비는 시간을 서로로 채웠다. 서로의 17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며 약속도 했다. 생일 당일은 아니더라도 우리 서로의 생일은 꼭 만나서 챙겨주자 했다. 다른 친구를 굳이 더 찾을 필요가 없었다. 세진은 내게 그런 친구였다. 올리브 나무를 선물한 것도 그런 의미였다.


 입대 직전 올리브나무를 줄 때까진 지금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가기 전에 입대를 결심했다. 재수를 했음에도 시원찮은 성적을 받게 돼 선택한 도피성 입대였다. 술 마시다, 울다를 반복했고 세진은 그때도 내 옆에서 묵묵히 위로해줬다. 세진이는 문과라면 모두가 선호할 경영대를 갔다가 1년 후 돌연 국문과로 전과했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세진의 입가엔 미소보단 투지나 열기가 담겨있었단 걸 그땐 미처 느끼지 못했다. 조금씩 변하는 세진과의 거리가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그 느낌 때문에 올리브 나무를 선물했다. 입대 이틀 전 올리브 나무를 주며 매일매일, 꼬박꼬박 챙겨줘야 한다고, 그때마다 나를 떠올려야 한다고.


 택배에 들었던 건 그 올리브 나무였다. 내게 3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구석에 화분을 내려놓을 때부터 관심을 끄고 싶어도 끌 수 없었다.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세진의 죽음이 떠올라 꺼림칙했다. 사고사인데도 미리 유언을 작성했다는 것부터 내가 아는 세진이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남들과 달라지려 했는지 괜히 화도 났다. 그 유언장에 고작 올리브 나무를 갖다 주란 말만 남겼다는 건 더 참을 수 없었다. 말려 죽이지도 못할 이 식물을 차라리 내동댕이치려고 집어 올렸다. 그때 깨달았다. 지금의 이 치미는 감정은 분노나 서운함이 아니었다. 그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이었다.


 전역이 다가올 때쯤 세진은 고등학교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거나 휴가 때 만나면 나에겐 생경한 말들이 세진의 입엔 자주 올랐다. 저항, 실천 등의 말들이었다. 안 하던 SNS도 시작하더니 외면, 은폐, 가시화 등이 가득한 글이 자꾸 올라왔다. 그놈의 공동체란 말 좀 그만 쓰라고 댓글을 달고 싶었지만 댓글엔 세진과 비슷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뭔가 항상 화나 있는 사람들. 세진의 글이 좋아요를 많이 받을수록 난 세진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전역 후 나는 취업이 잘 된다는 컴퓨터공학과에 가까스로 진학했다. 그때 축하인사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나보다 한 달 더 빠른 세진의 생일날, 세진은 집회를 가야 한다 했다. 다른 날 보자니까 그 주간은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거라 답했다. 그 따위 것들이 뭐가 중요하냐고,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냐고, 너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너 취업 준비는 하고 있냐고, 우리 약속 잊었냐고,  띄어쓰기까지 또박또박 적어가며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써내려갔다. 하지만 정작 보낸 건 단 세 글자였다. “알겠어” 집회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서운함보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들을 것 같았다. 둘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며 새로운 만남을 이어갔다. 점차 서서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졌다. 세진의 생일날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열일곱 이전으로 돌아갔다. 없던 것이 됐다.


 이 올리브 나무와 함께한 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작은 꽃이 피려는 것을 보니 곧 올리브 열매도 맺으려나보다. 보통 첫 열매가 생길 때까지 5년 정도 걸린다했으니 아마 처음 열리는 것일 테다. 올리브나무를 보며 내가 외면했던 세진의 죽음을 떠올린다. 웬만해선 죽지 않는 올리브를 너에게 선물한 내가 잘못했던 걸까. 그렇게 나를 기억해주던 널 무시한 나는 지금 죗값을 치르는 걸까. 우린 서로의 변화를 껴안아줄 정도로 소중하지 않았던 걸까.


 세진의 허무한 죽음은 2라는 숫자로 축약됐다. 지난해, 예년과 달리 수도권을 강타했던 태풍은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두 명 중 한 명이 세진이었다. 그날 TV에선 ‘속보, 2명 사망, 27명 부상’이란 짧은 뉴스가 보도됐다. 나는 칼국수에 깍두기를 얹다 받은 전화로 그 두 명 중 한 명이 세진의 죽음인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은 뉴스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며, 역대급 태풍이 온다더니 기상청이 또 유난 떨었다고 껄껄댔다. 식당 공중에 매달린 TV의 채널은 리모컨 버튼 하나로 금세 시끌벅적한 예능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다뤄질 죽음이 아닌데, 세진이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하지만 2라는 숫자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하찮았다. 다들 바빴다. 돈 벌고 웃고 떠들고 밥 먹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채워졌다.




 올리브 나무에 물을 줄 때 가끔 세진의 SNS를 들어간다. 1년이 지났는데도 SNS에는 아직 안 본 것들이 있을 정도로 게시물이 많다.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던 걸까. 분노와 슬픔, 담담함 등이 그의 글에 묻어 있었다.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원인보단 결과로 보였다. 그 감정을 표현할 출루였을 것이다. 세진의 시를 읽으며 이제 왜 그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세진을 지우지 않으려 하는 노력을 세진은 항상 하고 있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간직한다는 것이라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더 묻고 대화하고 이해하려 했다면 나도 세진과 함께 했을까.


 올리브 나무는 세진이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사실보다 세진이 남긴 흔적, 그러니까 써내려간 글과 외쳤던 말을 상기시켰다. 죽음과 함께 하는 삶, 외면하지 않는 삶은 세진의 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세진은 아마 계속 이런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열매는 하나의 씨앗에서 피어나지만 혼자가 아니다” 오늘 유독 눈에 들어온 이 말이 올리브 나무를 통해 세진이 나에게 전하려던 말 같았다. 올리브 나무를 3년 동안 이렇게 잘 키우려면 하루에 한 번은 올리브 나무에 관심을 줘야 했다. 세진은 그때마다 나를 떠올렸을까. 우린 서로를 계속해서 떠올리며 멀어졌던 걸까.


 보려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됐다. 세진처럼 분노하는 일이 잦아졌다.  낯설었던 그의 언어와 비슷한 감각을 지닌 말들이 내 SNS에도 조금씩 침투해왔다. 열매가 맺히고 화분을 옮겨 심을 땐 내 목소리가 더 울리고 있을 것 같다. 연대를 강조하는 세진의 2년 전 게시물에 조심스레 댓글을 달았다. “삶이었던 너의 죽음을 기억해. 허무하지도 하찮지도 않았던 너의 삶을 떠올릴게.” 그리고 한 마디 더 적었다. “생일 축하해.” 올리브 나무엔 매일 물을 줘야 했다.




* 소설이라 불리기엔 부끄러운 글이라 픽션이라고만 부릅니다. 언젠간 픽션이 아닌 소설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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