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여행의 종점, 남부여행
숙소를 정리하고 나서니 오전 9시이다. 기차시간에 늦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둘러 피렌체역으로 향한다. 오늘부터 닷새동안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할 것이다. 해안길이 절경인 아말피, 포지타노로 유명한 곳이다.
나폴리역에 하차해서 소렌토에 도착한 후 다시 20분가량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긴 여정이다. 그런데 에어비** 호스트가 어찌 좀 성가시다. 며칠 전부터 혼자 숙박하는지 몇 시에 오는지 계속해서 물어본다. 처음부터 이미 혼자 간다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도착 시간은 대략 오후 3시가 좀 넘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가는 길에 정말 혼자 오는지 또 물어온다.
'왜 계속 혼자 오냐고 반복해서 물어보는 걸까? 설마,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는 건가...'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꽤 먼 길을 나서는데, 그녀의 집요한 질문이 번거로웠다. 그냥 열쇠를 둔 장소를 알려주면 알아서 입실하겠다고 하니 대면해서 건네주는 게 룰이라고 한다. 비대면 입실도 가능하다고 안내를 봤던 건 착각이었나 보다.
숙소에 도착한 건 예정시간보다 2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소렌토까지 무탈하게 도착했지만, 거기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버스에는 번호가 없었다. 중간 혹은 최종 목적지만 적혀 있었는데 초행길에 이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반대편 버스정류장을 계속 오가니 한 노부부가 괜찮냐고 묻는다. 호주에서 왔다고 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고 한다. 그분들 덕분에 겨우 방향을 찾아서 같이 버스를 탔다. 목적지가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버스기사에게 목적지를 한번 더 확인했다. 애초부터 짐작되는 버스를 붙잡고 목적지부터 확인해 볼걸 그랬다.
숙소로 가는 버스를 해안도로를 계속 달렸다. 지대가 높아서 바다 쪽으로 난 집들은 위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반대편은 약간 언덕배기에 집들이 높이 지어져 있었다. 숙소 앞으로 도착했다. 바다뷰로 예약을 했던 덕에 지척거리에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분명 구글맵에서 가리키는 숙소 앞으로 도착했는데, 딱 찾는 그 번호만 보이질 않는다. 이미 핸드폰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다. 도착 예정시간을 한참 넘기자 호스트는 화가 난 목소리다. 그녀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숙소가 보이질 않는다. 다시 도로를 건너 다니며 헤매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방전된 핸드폰이 꺼졌다.
'맙소사...'
하릴없이 캐리어를 들고 집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바다 쪽이 아닌 언덕 쪽에 있는 집들로 꼬불꼬불하게 펼쳐진 계단을 오른다. 어느새 제일 꼭대기집 문 앞에 도착했다. 사람이 없을까 문 앞을 두리번거린다.
"멍멍멍!! 왈왈왈!!!"
갑자기 강아지 두세 마리가 대문 안쪽에서 대문 밖 옆집에서 양쪽에서 뛰쳐나온다.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다행히 물진 않는다. 시끄러운 소리에 집주인이 마당으로 나온다. 단발머리를 한 청년이다.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본다. 다행히 의사소통이 된다. 사정을 설명하니 괜찮다면 집으로 들어와 차와 빵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충전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다.
'갑자기 차와 빵? 집으로 들어오라고?'
불신으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더니, 그가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그의 도움 없이는 숙소를 찾을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 용기를 내어 그의 아름다운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의 주변에 두세 마리의 강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낯선 손님을 바라본다.
이 집 저 집 강아지들이 큰 이벤트에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든 것 같다. 주인이 환영하는 손님에게 강아지들은 이미 호의적인 태도를 갖췄다. 어찌나 충성스러운 존재들인지... 살랑거리는 꼬리가 영락없는 강아지풀이다. 사랑스럽다. 마당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깨진 타일로 아름답게 장식한 둥근 탁자와 의자가 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구나...'
시멘트 혹은 돌로 만들어 마당의 일부가 된 타일탁자와 의자는 푸른색과 흰색이 주를 이뤘다. 바다의 배경과 잘 어우러지는 색이다. 탁자 너머로 꿈을 꾸듯 황홀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푸른 바다를 퍼다 주기라도 하듯 푸른 바다가 품으로 안겨오는 것만 같았다. 앉아서 바다를 감상하며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고 혹은 ‘바다멍’을 할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안채에 두 집이 있었고 그의 옆집 친구인듯한 청년이 충전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앞서서 걷는다. 이미 안심한 마음으로 주저 없이 그를 따라나서는데, 등 뒤에서 단발머리의 청년이 나를 불러 세웠다.
"Madam!"
마담이라니... 지금껏 들어본 호칭 중에 가장 정중하고 아름다운 호칭이었다. 그러고 옆을 보니 전기 콘센트가 있었다. 마당에 이게 있다니... 결국 꼭 맞는 충전타입을 찾아줘서 충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충전기 옆에 걸터앉아 있으니 그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어머니로 보이는 노부인이 시원한 레몬차와 레몬파운드케이크를 들고 나온다. 의심이 많기에 그녀의 권유를 조심스레 거절했지만, 대뜸 휴지로 빵을 집어서 손에 쥐어준다. 시원한 레모네이드와 함께!
어쩌겠는가, 이쯤 되면 먹는 게 예의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건넨 레몬향이 짙은 케이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레모네이드는 단맛이 강하지 않아 시원했다. 비타민이 몸속에 충만해지니 피로감도 가신다. 강아지들이 주위로 모여든다. 만져달라고 등을 갖다 대거나 혹은 발랑 뒤집어서 누워버린다. 만지고 싶은 욕구와 혹여나 심기를 거슬러 물릴지도 모른다는 갈등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그 귀여운 털에 조심스레 손을 올린다.
핸드폰이 켜지고, 호스트와 다시 통화를 하지만 이미 흥분한 그녀와 소통이 어렵다. 결국 그들이 대신해서 소통을 해준다. 얘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소리를 냅다 지르는 게 전화기 밖으로 들린다.
‘어쩌나... 이런 민폐가 또 있나!’
통화를 마무리한 단발청년_알렉산드로_는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자신들 집에도 남는 방이 많으니 필요하면 말하라고 한다. 도로 밑에서 차 시동 소리가 들린다. 도로를 내려다보고 호스트의 차가 온 것을 확인한 알렉산드로는 한번 더 호스트와 통화를 한다. 모든 상황을 척척 해결하고는 약속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먼저 길을 나선다.
뒤따라 나온 마리오가 캐리어를 덥석 집어 들고는 앞장서서 내려간다. 덕분에 수월하게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신비하게 생긴 아기고양이를 볼 여유도 생겼다.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마리오는 차 근처에 캐리어를 툭 두고는 무심하게 다시 돌아간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무심한 듯 정중한 그의 뒤통수에 대고 " Thank you!"라고 크게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젓고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숙소는 길에서 밑으로 살짝 내려가야 보였다. 바로 앞에 두고도 한참을 헤맨 이유다. 다혈질인듯한 호스트와도 대화를 해보니 결국 오해가 있었다. 숙소를 예약하고 어플을 통한 채팅으로 소통을 했다. 처음에는 영어로 하다가 한국어--> 이탈리아어로 자동으로 변경되는 기능을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탈리아 사람이니 호스트도 이런 시스템을 쓰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어로 쓰다 보니 주어의 단수와 복수가 혼합되어 쓰인 듯하다. 아마도 '내가 간다...라고 했다가 우리가 간다...'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되면서 혼란을 가중던 듯하다. 그녀에게 설명하니 그녀도 이해를 한 듯하다. 호탕한 그녀다.
금세 풀린 그녀의 얼굴을 보니, 한국사람과 닮은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박하게 준비하다 보니 안내사항은 대충 읽어 넘겼다. 나중에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정류장에 내려서 걸어 내려오는 과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이때 좀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오해가 풀린 그녀는 금세 친절해졌다. 그녀도 화를 냈던 게 미안했는지 그 후로 체크아웃을 할 때까지 아침마다 안부를 물어왔다. 그때마다 그녀가 가진 관광상품을 이용할 의향이 있는지도 함께 물어왔다. 정확한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녀는 뛰어난 호스트를 넘어 뛰어난 사업가임이 분명하다.
숙소는 훌륭했다. 아담했지만 청결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아름다웠다. 그릇이며 준비해 놓은 아침거리 등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다. 화장실 창문 밖으로 난 빨래건조대가 유용하게 쓰였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 바다를 끼고 있지만 그다지 습하지 않은 지중해의 날씨 덕에 빨래는 금세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창문밖으로는 먼 듯 가까운 듯 바다가 보인다. 숙소를 나와서 바다 쪽으로 난 골목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집들을 구경한다. 좀 더 가다 보니 가파른 긴 계단이 보인다. 신비롭다. 영화나 동화 속에서 보던 풍경 같다. 천천히 내려가보니 바로 앞에 거친 돌로 된 해변과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석양이 지는 해변은 황홀했다. 동화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곳에 한국사람들과 흡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파란 눈동자, 초록 눈동자 외형은 약간 다르지만 한민족과 내면이 공유하는 듯한 이탈리아인들이...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바다]
단발머리의 알렉산드로와 풍성한 곱슬머리의 마리오, 그리고 인심 좋은 우아한 이탈리아 할머니까지...
고맙다는 인사도 거추장스럽다는 듯 가볍게 돌아서던 마리오의 뒷모습은 긴 여운을 남겼다. 대가 없이 베푸는 호의와 친절, 그 자체였다. 잠깐 천사들을 만난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천사로 사는 것은 번거롭긴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바다와 레몬이 지천에 널린 그곳, 푸른 바다 위에 빛나는 햇살보다 더욱 빛나는 친절과 따뜻한 호의가 있는 이탈리아 남부는 그런 곳으로 기억 한편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