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또한 모든 걸 다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는 이 진실을 마음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퀴블로스(Elisabeth Kübler-Ross)-
“여보세요. 나다.”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어머니 목소리다. 아버지가 아프시단다. “여기 병원 의사 선생님이 서울의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하신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어머니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보고 모실게요.’라고 안심시켜드렸다. 아버지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시고 3년 만에 돌아가셨다. 내가 50에 들어섰을 때이다. 나는 언젠가는 이런 일이 올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새벽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차를 몰았다. 가족을 태우고 내려가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내 눈에서 눈물샘이 터진 것 같았다.
나이 50이 되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들의 무게감이 확 느껴진다. 사람들은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을 때는 익숙해져서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른다. 없어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들은 왜 있을 때 원(願) 없이 잘하지 못할까?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노랫말 가사가 생각난다. 부모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부모님이 계실 때 마음이 든든했다는 것을 몰랐다. 가슴 전체가 통째로 도려내진 것 같은 상실감이다. 배우자의 부모님도 돌아가신다. 고향에 계신 집안 어르신들도 명절에 내려갈 때마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그때 알았더라면 좀 더 잘해드렸을 텐데…
나이 50에는 친구의 부고(訃告)를 받기도 하는 나이다. 아는 지인의 사망 소식도 들린다.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이 점점 벗겨져 나가는 느낌이 든다. 장례식장에서 느끼는 심정은 슬프고 착잡함이고 두려움이고 불안함이고 아쉬움이다. 익숙한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이런 건가? 예전의 친구 모습이 떠오른다. 바로 자신 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속에서 외로움의 감정이 올라온다.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상실의 아픔을 절절하게 느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인가 보다. 자신의 나이는 아직 죽음과 같은 삶의 과정을 맛볼 시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 벌써 주변에 소중한 인연들이 떠나간다. 나이 50은 상실감을 경험하면서 어른이 되는 시기다.
상실감을 느끼는 대상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만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관계가 끊어지는 경험을 할 때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 자신과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바라는 기대는 그만큼 크다.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거나 져버렸다고 느끼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보냈던 믿음이 아깝다고 느낀다.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가슴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서 분노가 치민다. 나이 50이 되면 주변에서 이혼했다는 소식이 귀에 더 잘 들린다. ‘졸혼’을 선택하거나 별거하는 부부도 있다. 이혼이나 졸혼이나 그게 그것 같은데…. 부부가 이혼을 결정한다는 것은 서로의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때 부부 모두 커다란 상실감에 빠진다.
나이 50에 경험하는 상실감의 대상에는 자녀도 있다. 사람들은 자녀를 일찍 해외 유학을 보내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또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유학을 보낸다. 기러기 생활을 해온 사람은 자녀의 공부가 끝나면 가족이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외로움을 견딘다. 그렇게 혼자 돈을 벌어 학비를 보낸 배우자는 외로운 기러기가 된다. 가족도 돈도 다 달아난다. 부모는 자식이 독립하기를 바라지만, 자녀가 부모 곁을 떠날 때는 마음이 슬프고 아프다.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3대가 가업(家業)을 이어가며 같이 사는 모습을 볼 때 부러울 뿐이다. 든든한 자녀가 부모가 하는 일을 배우면서 같이 산다. ‘저 사람은 참 마음이 뿌듯하고 든든하겠다.’라는 생각이 올라온다. 자녀는 취업하거나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난다. 자신의 소중한 것이 떨어져 나가는 심정이다.
이런 상실감은 나이 50이 되면 한꺼번에 자신을 힘들게 한다. 그럴만한 조건의 나이기 때문이다. 몸은 이전 같지 않다. 다음 50년을 살 수 있게 내부를 완전히 보수하는 시기다.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쓴다. 치아가 망가져서 임플란트도 한다. 전국의 유명한 산을 누비고 다녔는데, 무릎이 삐걱거린다. 족구를 할 때 마음은 청춘인데 욕심을 내다가 발목의 인대를 다치기도 한다. 목과 허리, 혈압과 심장박동에도 이상이 생긴다. 머리카락 굵기도 가늘어진다. 흰머리가 늘어나고 머리숱이 점점 없어진다. 매일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생리적 기능도 떨어진다. 자신감도 떨어진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던 것들인데, 자기가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나이 50은 계절로 보면 가을인가 보다. 보낼 건 보내야 하는가 보다.
나이 50이 되면 대부분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을 때 가 다가온다. 은연중에 당연한 걸로 여겼던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자신의 명함이 나 자신이라고 알고 있다가 내가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 명함의 가치도 사라진다. 발밑의 땅이 푹 꺼지는 느낌, 초라한 느낌, 뻘쭘한 느낌, 얼떨떨한 느낌이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려놓을 때와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을 때의 상실감의 결은 다르다. 세계적인 기업에서는 사람을 내보낼 때도 그 사람의 명예와 자존심을 충분히 배려해준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자기 자리가 생긴 게 아니다. 자신이 쏟아부은 열정과 에너지의 결과로 얻은 자리다. 이런 자리를 미련 없이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직장에서 나이가 들면 자리를 내려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 조기 퇴직, 명예퇴직, 정년퇴직 등의 이름으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일터를 나와야 한다. 나이 50이 되면 삶의 반 이상을 한 직장에서 보냈을 것이다.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의 폭풍을 만나지만 않는다면,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운이다. 후배들의 눈치, 회사의 분위기에 눌려 견디지 못하고 실익을 저울질하고 명예퇴직을 선택하기도 한다. 능력이 뛰어난 일부 행운아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직장을 옮겨 다니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꿈같은 이야기다. 한번 나오면 무리에서 낙오된 느낌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멍하고 불안하다. 손에 있던 것이 없어진 허전한 느낌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동업자의 배신으로 재산도 잃고 사람에 대한 믿음도 잃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나이 50에 이런 시련을 겪으면 몸도 마음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이제 사업의 결실을 조금씩 맛보면서 숨을 고르고 여유를 가질 시기다.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라고 머릿속으로 몇백 번을 되뇌어봐도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가 없다. 자신이 일군 사업장을 눈앞에서 뺏기는 심정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와 유사하게 주식을 하고 있는데, 그 주식이 폭락했다. 하루 만에 투자 금액은 반 토막이 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50 이후에 내 삶을 풍족하게 해줄 재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되뇌면서 망연자실한다.
이런 일을 당하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당한 상실감은 자기 자신을 서서히 옥죈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상실감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지 있던 것이 사라져 좀 불편함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살아갈 의욕마저 잃을 정도로 그 충격은 크다. 상실은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다. 깊은 슬픔이다. 자신이 설마 이런 일은 겪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다. 설사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되면 순간적으로는 충격을 받는다. 일어난 현실이 실제로 믿어지지 않아서 바로 인정하지 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한 사람과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탓을 한다. 화도 나고 자책도 한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상상으로 지금 일어난 현실을 바꾸어보기도 한다. ‘메타버스’ 세상으로 잠시 이동해서.
자신의 몸과 소중한 사람, 분신과도 같았던 자신의 명예와 지위, 사업, 재산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 때 나락으로 떨어진다. 마음은 끝없이 깜깜한 구덩이에 갇힌 느낌이다. 내가 40대와 50대에 두 번 상처를 받았을 때, 매일 밤 꿈을 꾸면 나타나던 이미지를 기억한다. 내가 끈적끈적한 느낌의 진흙 구덩이에 빠져 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곳을 향해 허우적대기만 하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내가 경험한 상실을 무의식 상태의 꿈에서라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런 상실도 시간이 지나면 내 몸과 마음에 소나무 옹이처럼 상처의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다. 나는 지금도 조그만 상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렵고 슬픈 느낌이 마음속에서 올라온다. 내가 볼 때 상실은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나그네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삶에서 다양한 상실을 겪지만, 50대에는 상실을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시기이다.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거나 지나치게 상실의 경험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면 비탄의 늪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상실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상실의 경험을 터놓고 말하는 것은 상실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상실에 대한 자신의 깊은 내면의 경험을 꺼내어 풀어놓음으로써 기존에 알고 있던 자신의 심리적 관점을 부수고 새로운 관점을 재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사회적 전이(psychosocial transition)’라고 부른다. 심리사회적 전이는 상실의 경험에 대해 직면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깊은 숙고를 통한 반성을 할 때 일어난다고 한다.
상실은 깊은 슬픔(grief)을 애도하는(grieving) 과정을 통과할 때 상실이 전하는 진정한 메시지를 자기 자신에게 전해준다. 상실은 무감각, 마비, 의욕 상실, 후회, 부정, 분노, 수용 등의 내면 경험을 자신의 의식 공간에 반복적으로 데리고 올라온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자신의 몸과 마음의 기능에 혼란이 일어난다.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 상실의 심리사회적 전이 과정은 단순하지도 순조롭지도 않다. 상실의 경험을 직면할 때 긴장과 위축, 회피하고 싶은 욕구, 두려움, 절망, 무기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자신의 삶의 양식을 완전하게 바꾸기도 한다. 상실은 언제나 일어난다. 나이 50은 삶의 동반자인 상실에 대한 면역력 수업을 받는 시기이다.
(Tip! 상실을 경험할 때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글)
○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자신의 죽음 직전에 쓴 저서 『상실 수업』에서 상실에 대처하는 지혜를 알려준다. “결국 죽음을 비롯한 다양한 상실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상실을 피할 수 없었기에 다른 선택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못 해준 것에 대해 후회하기 마련이다. ……(중략). 생각나는 모든 후회에 대해 평온함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라.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해본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완벽하고 후회 없이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삶 속에서 당신은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pp. 68-69).
○ 50대는 상실의 경험을 많이 하는 시기다. 자신의 신체적 건강과 자신이 성취한 것,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잃기도 한다. 상실의 파도가 밀려올 때의 깊은 슬픔과 후회, 분노, 절망을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또는 믿을만한 누구에게 털어놓을 때 더 깊이 치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