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역효과를 야기 하듯이, 심리적인 내면세계에서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측면들을 통제하려는 시도 역시 역효과를 초래한다. 당신은 자신 및 타인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실추시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Eifert, Mckay, & Forsyth-
‘낄끼빠빠’는 주접을 떨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제 한 물간 신조어가 되었지만,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뜻이다. 낄끼빠빠를 못하면 상대방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어휴, 또 나타났어. 역겨워!’라는 혐오의 구정물이 쏟아진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어느 유명한 기업인의 어록이 있다. 사람들에게 ‘무한한 도전정신을 가져라’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낄끼빠빠’는 자신을 살리는 신호등이다. 신호등에 따라 자신의 에너지를 쓰면 마이너스(-) 관계는 피할 수 있다. 앞으로 자신 삶의 여정에서 에너지는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주접떨다’는 사전에는 ‘욕심을 부리며 추하고 염치없게 행동하다.’로 설명되어 있다. 주접과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는다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멍’ 때릴 줄도 모른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지루하다.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몸이 근질거린다. 입이 들썩거린다. 자기 마음속의 생각이 각본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은 남들보다 경험도, 아는 것도 많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니면 회사가,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슈퍼맨 증후군에 가깝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있다.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자기가 끼어들 데가 어딘지 찾는다. 자신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 그 에너지를 여러 군데 나누어 쓰면 빨리 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모른다.
나이 50이 되면 이것저것 일터나 사적 모임에서 자신의 눈에 아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자기 분야에서 소위 한가락 하던 사람이다. 자신의 몸이 익힌 기능과 머릿속에 들어있는 경험이 아깝다는 생각도 올라온다. 세상 물정도 이제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한다. 자기가 아는 것을 조언해주고 싶은 마음에 슬며시 안 그런 척하면서 낚싯밥을 여기저기 던진다. 예전에는 낚싯밥을 던지자마자 입질이 왔는데, 이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낚싯밥을 더 많이 뿌려본다. 간혹 자기를 환영하는 곳이 있다. 그들은 조언과 충고를 듣는 척하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내민다. ‘당신은 이 분야에 경험과 지식이 많으므로 우리 사업에 공동 투자하면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라고. 자신의 오지랖을 받아주는 곳에 기꺼이 참여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블랙홀인지도 모르고!
조언과 충고는 상대방이 원할 때 해야 좋게 받아들여진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조언과 충고는 ‘또 설(說)을 풀고 있네’라는 푸념과 함께 외면당한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 중에는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참견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관계는 나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노리고 여기저기 숟가락을 걸치는 사람도 있다. 위험인물이다. 이권에 개입하는 선수나 꾼일 수 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도 나서서 참견하다가 오히려 일을 더 꼬이게 하면 민폐다. 민폐를 끼친 당사자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와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소위 마당발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일터에서 마당발은 여기저기 끼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쁘다. 공식 모임이든 비공식 모임이든 끼지 않는 데가 없다. 그 사람의 말을 옆에서 듣다 보면 두루두루 아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두루뭉술하게 밥숟가락을 얹는 식으로 여기도 번쩍 저기도 번쩍 홍길동이다. 회사 안팎을 불문하고 인맥을 자랑한다. 회사 내의 공식 회의에도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외부의 비공식 모임에서 선배들 모임에도 얼굴을 내민다. 후배들 모임에도 자신이 받은 명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마당발 왕중왕을 가려도 될 정도로 여기저기 참견하지 않는 데가 없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영향력을 넓히려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심지어 일터에서 누릴 만큼 누린 것 같은데 퇴직을 하고서도 주접떠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해도 될 텐데, 꼭두각시 끈을 조종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걸거나 SNS로 끼어든다. 일터의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다. 주접을 떨고 오지랖 넓게 끼어들 때 그의 에너지가 쓸데없이 소모된다. 그런 행태를 보일수록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는 걸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을 그때마다 밀어내는 일은 짜증 나게 한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못 본 척 반응도 하지 않고,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면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주접떨고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남의 일에 끼어든 적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나이 50에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점검할 때, 자기 안에 이런 주접떨고 오지랖 넓은 그림자가 숨어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주접떠는 습관이 배어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는 주접떠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적극적으로 ‘남의 잔치에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남의 일에 끼어드는 행태를 적극적 주접떨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일이 좀 복잡해지기도 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훼방꾼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두 번째 기준이 있다. 이런 행태를 소극적 주접떨기라고 부를 수 있다.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충고하고 참견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낯이 두껍지도 않다. 그렇지만 하는 일을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사람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다. 한꺼번에 일을 벌여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남이 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터나 사적 모임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꼭 이런 사람이 등장한다. 대화 중에 자신의 귀는 닫힌다. 마음속에서는 끼어들고 싶다는 재잘거림이 물 끓듯이 올라온다. 남이 말하는 중에 기가 막히게 끼어들어 말을 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놓는다. 눈치 없이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면적 주접떨기가 있다.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 대화(self-talk)를 하는 경우다. 자기 대화는 한 번 올라온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을 끼워 넣는다. 한 편의 드라마 각본이 될 정도다. 자기 자신 안에 이런 자기 대화로 주접떠는 자기가 있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이리저리 충고하고 시비하며, 검열하고 판단하는 자기다. 오지랖이 넓기로는 우주보다 넓을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주접떠는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앞으로도 쉼도 없이 자신 안에서 주접떠는 자기를 보게 될 것이다. 주접떠는 사람이 싫으면 만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주접떠는 자기는 알아차리지 못하면 피할 수도 없다.
심리학에 통제 욕구(desire for control)’라는 용어가 있다. 통제 욕구는 인간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통제 욕구가 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 처리하고 성취를 하기 위해 환경과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다. 통제 욕구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으면 삶의 적응에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통제 욕구가 집단 내에서 리더십 역할을 떠맡는데 지나치게 높게 동기화되어 있다. 그 사람은 주접을 떨고 오지랖이 높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공적인 관계를 사적인 관계로 바꾸어 친밀감으로 상대를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이다. 집단의 다른 사람들은 통제받고 간섭받는다는 압박감에 불평과 불만이 높아진다. 그는 조직 내에서 사적인 세력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일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때 해주는 조언은 역효과만 낳는다. 상대방은 자신이 통제받는다고 느끼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필자인 나도 주접떨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다. 아닌 척하고 고상한 척하지만 나도 소극적 주접떨기 꾼이고 내면적 주접떨기 꾼이다. 나도 이일 저일 모두 할 수 있다고 약속하고는 내가 그 일정에 묶여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이 올라올 때가 있다. 후배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나는 다짐한다. ‘오늘은 말을 반으로 줄이겠다.’ ‘충고하지 않는다.’ ‘조언이랍시고 늘어놓지 않는다.’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나는 그 다짐을 지키는 경우가 많지 않다. ‘아~ 오늘도 또 주접떨었네. 후배가 지겨워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올라온다. 꼰대 노릇을 하는 나를 본다. 나는 또 후회하고 다시 다짐한다. 주접떨지 말자. 내 에너지만 축나고 내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이제부터는 수성(守城)이다.
나이 50 넘어서 주접을 떨고 다니면 왕따 당하는 지름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는 적어진다. 일터나 가정, 사적 모임에서 적당한 주접은 분위기를 살리고 활력을 불어넣는다. 지나친 참견은 오히려 분위기를 망치고 관계를 유지하는데 독이 된다. 함부로 조언하지 말자.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일방적으로 전달하면 효과는커녕 상대는 외면한다. 또 관계가 오래 유지되기를 원하면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나이 들면 자신의 에너지를 아껴가면서 쓸데에 써야 한다. 후배가 원하지도 않은 일에 에너지를 쓸데없이 쓰면 하는 일 없이 바쁠 뿐이다. 이제부터 자신 안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지혜를 배울 시기다.
(Tip!) 주접떨기를 멈추는 연습
모임에 참석하자마자 심호흡하고 오늘은 주접떨기를 알아차리겠다는 의도를 낸다. 참견하려는 욕구가 올라오면 양 손가락을 꾹꾹 누르거나 살갗을 꼬집는다. 우선 멈춤을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신 안에서 어떤 경험이 올라오는지 알아차린다. 어떤 생각, 감정, 욕구, 감각 느낌이 올라오는지(예, 따끔한 느낌, 얼얼한 느낌~)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심호흡을 몇 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