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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25. 2020

나에게, 청소하기

대충의 미학

저는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매일 밥을 세 번이나 지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만큼, 매일 내가 사는 공간에 이런저런 먼지가 날아와 쌓이고, 그것들을 주기적으로 청소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믿기도 힘들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인간이 처한 그러한 일상의 현실에, 어린 마음에 심히 '경악' 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밤이 되면 이부자리를 또 펴고

또 아침이 되면 정리하고 

밤이 되면 또 펴고,

.

.

.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한 번, 

이부자리를 펴기 전에 한 번, 

엄마는 적어도 하루 두 번 온 방을 쓸고 닦았다.

물론 마루와 부엌, 현관, 대문 앞까지 

매일 청소를 거르는 날은 없었다.


거기에 세 번 이상 - 새벽에 일 나가는 삼촌, 혹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손님을 위한 밥상 차릴 일이 늘 있었다 - 밥을 차리고, 

거기에 대가족의 빨래를 하고 (할머니의 거부로 끝까지 세탁기 없었던 우리 집),

그러고 나면 엄마의 하루는 저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침저녁으로 씻고 관리하는 시간까지 더 하면, 

새벽부터 밤까지 할 일들로 심히 가득 찬 삶이었다.


엄마가 온전히 편히 쉬는 시간은

귤이나 군밤을 까먹으며 드라마 보는 시간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간조차도 

귤 까는 족족, 밤 까는 족족,  아이들 입에 들어가고,

할머니 과일 깎아 드리고,  

엄마 손은 쉴 새가 없었다.


엄마에겐 '드라마 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힘들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빛내는 유일한 보석 같은 시간,

바쁜 일상 속에 겨우 끼워 넣은 문화생활 절정의 순간.

드라마의 세계로 오세요, 오세요!


엄마는 드라마 보는데 말 시키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지금에서야 그게 너무나 이해가 간다!

나에게 유일한 휴식 시간, 일상의 하이라이트를 누가 감히 방해하는가! 썩 꺼져주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일상을 유지한다는 건 노동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엄마들의 시어머니들은 이렇게 핀잔했다.

너희들은 따뜻한 물 콸콸 나오는 수도 시설도 있고, 따뜻한 실내 부엌에서 전기밥통 놓고 일하면서 뭔 군소리니? 우린, 저 멀리서 물을 길어와, 새벽 찬 공기에 몸을 떨어가며 군불 때서 밥 짓고, 낮엔 농사짓고, 사이사이 새참 해서 나르고, 추운 날에도 얼음 깨 가며 손 호호 불어가며 냇가에서 빨래하고,  밤엔 희미한 등불에 바늘귀를 비춰가며 옷 짓고, 옷 깃고...'라떼'는 '드라마'가 뭐냐, '테레비'도 없었단 말이다!

그 시절 모든 일상의 편리는 누군가의 노동한 만큼에 달려 있었다.  

그 시절의 부자들은 살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노동력'을 사고 싶었다.

지금의 사람들이 신상 가전 제품이 갖고 싶은 만큼, 

그때의 사람들은 능력만 되면, 편리를 위한 노동력, '노예', '하인'이 갖고 싶었다.


일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노동력이라곤 

'자식을 위한 사랑과 헌신' 이라는 이름으로 둔갑 시킨 '부모의 노동력'과

'효도'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킨 '자식과 며느리의 노동력' 밖에 없었다.

아들의 노동력은 받은 노동력 만큼 되돌려 주는 셈이라 쳐도, 

며느리는 왜, 내 부모를 떠나 남의 집 '시다바리'로 살아가는가?

그래서 며느리는 대대로 억울했고, 억울하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나도 당한 걸 너도 해야지. 그래야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이지!'

하지만 세상은 자꾸 바뀌고,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들이 당한 똑같은 만큼 하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시어머니 눈에는 며느리가 너무 편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대대로 억울했고, 억울하다.


그리고 남자들 눈엔 '우리 엄마'만 고생 많이 한 불쌍한 여자다.

'그러니 아내여, 우리 엄마가 까라고 할 땐, 좀 까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남자들아, 효도는 제발 '셀프'로 하자. 니가 가란말이다, 하와이! 




이젠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시간을 쏟아붓고 싶은 만큼 선택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시대입니다. 아니 더 이상 집안일은 집안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문적 분야가 되고 있어요.


요리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요리하는 영상, 사진들을 소셜미디어에 내고 광고하며, 요리 레시피를 담은 책을 내고 요리 클래스를 운영하는 사업을 합니다. 


청소 정리를 즐겨하는 사람은 '정리 컨설턴트'가 되어 정리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환경을 변신시켜주고 대가를 받는 사업을 운영합니다.


김치를 잘 담그는 김치 명인, 된장 잘 담는 된장 명인의 레시피를 대기업들이 사고 싶어 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할머니 엄마 수준으로 집안일을 잘하는 건 더 이상 평범한 주부의 수준을 넘어서 특별한 기술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편리한 환경만큼 가사 능력이 도태되고 있고, 이제 옛 가사 기술은 자본을 만드는 기술로 인정받고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할머니와 엄마의 삶을 절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할머니에게 된장 만들고 간장 만드는 법을 배워두지 못한 게 상당히 아쉽습니다.




날씨가 '쨍' 하면, 평소 청소할 의욕이 많이 없는 저도 청소와 이불 빨래를 하고 싶어 집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쨍한 날 중에서도 '트리플' 쨍한 날! 저는 미국에 오래 산 한국어 사용자의 말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이고자 때로 '보그병신체' 처럼 흘러나오는 일상적으로 입에 붙은 문장들을 애써 지우지 않고 넘어갑니다.


저는 하루 종일 날 잡아 대청소를 한다든지, 온 집을 반짝반짝하게 하는 에너지와 노동력, 노동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청소도 결국은 훈련된 기술이고 실력이니까요. 청소 약품을 제조할 수 있는 화학적 기술 보유 여부 또한 각 사람의 청소 결과를 많이 다르게 합니다. 클로락스 같은 기성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환경과 건강을 배려하는 '유기농 친환경 소독액'을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고, 감자 껍질, 식초, 베이킹소다 같은 집에 이미 구비하고 있는 재료의 청소 효능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청소의 세계 또한 어느 기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차만별 각양각색입니다.


저는 '화학 석사 학위' 소지자로서 충분히 청소 약품 정도는 스스로 제조할 수 있는 화학적 지식과 기술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나, 귀차니즘이 주로 심신을 장악하므로, 손이 저절로 이미 누군가 개발해 놓은 기성 제품 '소독 와입'을 꺼내 사용하는 편입니다. 아주 가끔 제 손으로 '과탄산 소다'와 '베이킹 소다'같은 것들을 섞어 청소 약품을 만들 때도 있긴 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발생하는, 화장실 욕조와 싱크대 주변을 정말 깨끗이 청소하고 싶은 날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은 그런 날은 아닙니다. 기성 제품 사용으로 만족하는 날이에요. 오늘은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요즘, 모두들 '온라인 학습'을 하며 테이블에 붙어 앉아 생활하다 보니, 집에 있는 두 개의 대형 테이블 상태가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너무 창피할 만큼 심해서 '비포 사진'은 생략했습니다. 책과 노트, 종이, 필기구들이 먼지와 함께 이리저리 뭉치고 심하게 쌓여 있어, 평소 깔끔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내 눈에도 마주치기 부담스러워져 있었습니다. 보통은 아이들 영역은 아이들 스스로 정리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입니다만, 몇 달에 한 번쯤 오늘처럼 제가 견딜 수 없는 날은 제가 나서 버립니다. 오늘은 아침 기상과 함께 테이블 정리와 청소부터 시작했어요.  


내가 주로 장악하고 사용하는 부엌 식탁 테이블(좌) 와 작은 애가 장악하고 사용하는 거실 테이블 (우)

압니다. 정말 깔끔한 분들 눈에는 아직 모자라 보일 거라는 거. 이러고도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 있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제가 '미니멀리스트'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학교 갔다 온 사이 할머니가 제 책상을 싹 깨끗이 치워 놓을 때마다 정말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나름의 순서대로 제가 일하기 편하게 물건이 배치되어 있던 것이 다 어디로 갔는지 다 다시 찾아내야 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아이들 물건을 치울 때 저는 매우 조심하는 편입니다. 아이가 필요로 할만한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게, '주인'이 이리저리 벌려놓은 물건들의 자리를 이동시키지 않고 깨끗이 청소해 내야 하는 '하인'의 마음 가짐으로 매우 고려하고 배려하며 정리를 하다 보니, 이 정도가 최선이 되고 맙니다. 책상을 싹 깨끗이 비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아이를 배려했더니, 아이가 칭찬을 해 줍니다. 


엄마, 너무너무 청소 잘하고, 정리 잘했어요! 너무너무 맘에 들어요!

인생 뭐 있나요? 자식한테 칭찬받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인생의 '동전 양면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됩니다. 제가 깔끔 떨지 않는 만큼, 좋은 점들도 있습니다:


일단, 아이들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집에 사는 아이들은 딱 두 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먹는 건 식탁에서만 먹기. 바닥에 떨어뜨린 건, 떨어뜨린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치우기 


또한, 제 마음이 편합니다. 청소 상태에 대해 주로 신경을 끄고 지내는 만큼, 아이들이 만들고 그리며 어지르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입니다.


가장 좋은 건, 글쓰기와 독서에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글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하루에 청소 정리 시간을 15분으로 정해 놓습니다. 주로 그 15분도 다 채우지 않고, 하루는 1층 베큠 한 번 후다닥, 다음 날은 2층 베큠, 오늘 같은 날은 테이블 정리, 또 어느 날은 부엌 물건 정리 청소, 다른 날은 도네이션 할 옷 골라내기... 짧게 굵게, 한 공간, 한 가지 종류의 청소만 공략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음식도 하루 한 두 가지만 만듭니다. 오늘은 김치찌개와 호박죽을 해 놓았습니다. 호박죽은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 자주 만드는 음식은 아닌데, 이틀 후가 미국의 큰 명절 '추수감사절'이라 - 이번 주 전체가 명절 느낌입니다 - 분위기에 휩쓸려 호박을 샀고, 호박을 산 김에 만들어 보았습니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

목요일 '추수감사절' 상차림은 '보스턴 마켓*'의 도움을 빌릴 예정입니다. 

*보스턴 마켓 (Boston Market): '보스턴 치킨'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패스트푸드 식당. 특히 추수감사절에  공급하는 '추수감사절 음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개인적인 생각.   https://www.bostonmarket.com/thanksgiving-dinner-catering-2020/


 이제 오늘 할 '해야 할 일들'이 마무리되고, 글 쓰고 책 읽는 자유의 밤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이 글 한 편을 끝내고, 운동을 하고 또 다른 주제의 글을 또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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