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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22. 2020

나에게, 밥 짓기

트라우마를 이겨낸 인간 승리

나 스스로를 건강하게 먹이기 위해, 나 아닌 타인을 돌보고 대접하기 위해 밥을 짓은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큰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쌀만 씻어 꽂으면 밥은 전기밥통이 알아서 해 주는 시대에 밥 짓는 게 뭐가 대수인가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줄 압니다. 이렇게 쉬운 '밥 짓기'가 저에게는 오랫동안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저는 다른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대가족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가족 간 오손도손 정다운 분위기'가 아니라, 엄숙을 가장한 학대가 난무하는 '극단의 가부장적 분위기'였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 자신들의 서열을 과시하며 까탈스럽기 그지없었고, 엄마는 그 구역의 '동네북'처럼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상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할머니는 엄마에게 두 번 세 번 다시 밥을 하게 했고, 아버지 앞에 놓인 상은 뒤집히고 날아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저녁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몇 번이나 다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하고,... 손을 덜덜 떨면서도 입맛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상을 차리고 또 차려내야만 하는 엄마. 제 눈에 비친 엄마는 부엌일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저주에 걸린 비운의 운명, 벌 받으며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엄마가 저녁마다 부엌일을 하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 스트레스와 긴장, 조바심이 제 마음에 그대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부엌 트라우마'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요? 부엌은 저에게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지옥'과 같은 의미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바로 화장실에 달려가야 할 정도로 손에 땀이 나고 떨리고 몸이 극렬하게 반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공대에 갔던 것, 남자들처럼 옷 입고, 농구공 축구공 들고 다니며 남자들이 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남자들이 하는 공부를 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모두 부엌에 들어갈 일을 막아 보려는 심리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부엌에 들어갈 일이 없는 삶을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연구실, 실험실에 머무르는 삶을 만들어 갔던 것인지 몰라요. 


그런 내가 결혼을 했던 것은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큰 실수였습니다. 결혼이 불러올 생활의 변화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도, 나이가 되고 주변에서 결혼을 서두르니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해버렸던 것 같아요. 이런 기도를 하면서 결혼을 준비했어요. 


이 길이 제가 갈 길이 아니라면 막아 주세요.


아무도 막는 이가 없어서 저는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결혼은 함께 먹고사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심히 우려했던 대로 음식 담당 역할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그걸 피하려고 살아왔는데, 지혜와 눈치, 상대의 가치관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던, 멋모르는 나이 20대의 저는, '가족을 위한 음식 준비'는 당연히 오롯이 '며느리의 몫'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과 가족의 연을 맺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니, 성 역할에 뭔가 진보된 관념을 가졌겠지 하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하고 1년 정도 시댁 어른들과 시누와 함께 살았는데, 제가 당시 겪은 혼란과 고통의 폭풍은 되살리기 귀찮으니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스스로 '부엌 공포증'이 있는 여자라 상상하고, 1960년대의 한국으로 타임머쉰을 타고 가서 며느리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맛을 배우기를 중요시 여기는 어느 종갓집 큰 아들과 결혼했다고 상상하시면 적당한 그림이 나오지 싶습니다.


결국 분가해서 남편과 둘이서 살게 되었지만, 20년 전 미국은 배달음식 문화도 없고, 팁 문화 강한 미국에서 좋은 식당에 매일 다니는 것은 살림을 거덜 내는 일이었으므로, 둘이서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남편도 남자가 부엌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분위기에서 자라 부엌을 어색해하던 차라 - 한국에서 자란 여자는 당연히 자기 엄마처럼 음식을 할 줄 알겠지 의심도 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둘이 사는 게 정말 답 없는 하루하루를 만들었습니다. 둘 다 맞벌이를 할 때라, 직장을 마치고 집에 오면, 집에는 따뜻한 음식이 없으니, 피곤한 몸을 끌고 밖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그 시절엔 젊고 건강했으므로, 그렇게 값싼 카페테리아를 전전하며 버틸만했어요. 


하지만, 아이를 낳고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엄마가 가까이 계셔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해서, 엄마가 해 주신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 밥을 차려 주는 일은 제 몫의 일이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가서 밥만 하고 밥상만 차리는 되는 그 일조차도 저에게는 너무나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습니다. 부엌이라는 공간 자체가 저에게 주는 압박감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아이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일도 너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 소중한 존재에게 한 끼 밥도 제대로 못 차려 주는 인간인 것이 너무나 혐오스러웠습니다. 매일매일이 다 내팽개치고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나날이었습니다. 잊어버리고 아이에게 밥을 먹이지 않아 아이가 잘못되는 악몽에 시달리며 수없는 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매일같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아이들 덕분에 저는 그 무섭고 공포스러운 부엌에 매일같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엄마인데도 최고라고 여기며, 엄마가 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며 박수를 치던 아이들. 볼 때마다 방긋방긋 웃어주고 내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쏟아부어주던 이 아이들이 있어서 저는 트라우마를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이라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일어서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일이 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입맛에 맞추는 밥과 국, 간단한 반찬을 하는 일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익숙하고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부엌도 전보다 훨씬 익숙한 공간이 되었고, 부엌에 들어섰을 때 나타나는 몸의 반응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저는 남편과 관계가 많이 힘들어졌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고,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는 '진짜 사랑, 지금부터 시작합니다'라는 브런치 북, '10화 사랑을 지키는 특전사' 편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저는 그때, 남편에 대해 미움과 원망의 감정보다, 결혼 생활 10년 가까이 제가 뭘 만들던 음식 타박 한 번, 저의 남다른 '부엌 공포증'에 대해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던 남편에 대해 큰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부엌 공포증'을 극복해낸 제가, 남편을 위해서도 달라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떠날 때 떠나더라도,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실컷 만들어 주고 떠나자고 마음먹었어요. 이때쯤, 앤소니가 가르쳐 준 재료 공학도 정신(일상을 빛내는 보석들 매거진에 실린, 나에게, 커피 참조)과 반조리와 믹스의 세계 (일상을 빛내는 보석들 매거진에 실린 나에게, 베이킹 참조)가 저의 그럴듯한 밥상 차리는 실력을 '일취월장'하게끔 도와주었습니다.  라자냐, 스테이크, 생선 구이, 테리야키, 폭찹, 바비큐 립, 햄버거, 칠리,...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만들어 차려주었습니다.  


'하숙생 총각' 말만 해, '아줌마'가 다 만들어 줄게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이후, 제 삶의 모든 요소들이 좋은 방향으로 회복이 되었고 (혹은 되어가고 있고), 저는 이제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서 밥 한 끼 정도는 차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장착되는, 심지어 재미까지 느낄지 모를 쉬운 일이겠으나, 저에게 이 밥 짓고 상 차리는 능력은 '인간승리'이자 몹쓸 장애를 넘어선 '회복'과 '재활'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저의 어떤 다른 능력이나 기술보다,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차릴 수 있는 이 기술이 저에게 깊은 충족감과 안도감을 줍니다. 


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너무나 다행입니다. 이런 제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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