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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26. 2020

나에게, 피아노

 재미있는 놀이가 되어 주기를...


최초의 기억


저는 어릴 때 '피아노'를 참 좋아했었습니다. 피아노의 생김새, 피아노의 낭창한 맑은 소리, 흰색과 까만색이 규칙적으로 패턴을 이루는 건반 자체가 자아내는 이미지, 그걸 감싸 안은 큰 덩치의 운치 있게 잘 빠진 가구, 그 모든 것이 풍기는 분위기, 느낌... 다 좋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국민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좀 특이하신 50-60대 여자분이었어요. 당시 '교사'라는 신분이 발휘할 수 있는 '마케팅' 위력을 너무나 잘 간파한 분이라고 할까요. 학부모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한 영어 동화 전집들을 팔기도 하고, 여러 가지 '교육 자료'에 대한 '영업'을 끊임없이 하셨는데, 한 번은 그분의 음대생 딸이 피아노를 가르친다고 해서, 선생님 말이 '신의 계시'인 줄 알았던 당시 엄마들은 아이들을 선생님 딸에게 보내 '피아노 교습'을 받게 했습니다. 한 방에 여러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가, 사실 뭘 배운 거나 있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 선생님의 딸도, 피아노 수업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모양인지 그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의 뒷모습과, '피아노'라는 것과 처음 대면했던 순간의 느낌 정도만 기억납니다.


그런 식의 '피아노 레슨'은 '과외 교습'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었나 봐요. 레슨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공포한 '과외 금지령'이 떨어졌습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피아노 수업은 이제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은 확실히 만져졌습니다. 부산 변두리 동네, 상가 시스템이 발달하기 전, 피아노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직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누군가 내 앞에 '피아노'라는 진귀한 물건을 꺼내 맛만 보게 하고, 더 먹고 싶어 하니 감춰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엄마가 달 지날 때마다 찢어 주시던 커다란 달력 뒷면 흰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놀았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이 없었더라면, 기억도 못하고 넘어갔을 그저 어린아이가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첫 경험, 열망을 그림으로 표현해 본 한 순간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노는 제 모습에 부모님은 크게 감동을 받아버렸습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어린 시절 일화를 목격한 그런 느낌의 반응이었어요. 아빠는 당장 어디서 전자 키보드를 하나 사 오셨어요. 저는 그걸 가지고 재미있게 놀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윗동네에 '피아노 교습소'가 하나 생겼다는, 그 동네 살던 친구들이 죄다 그 교습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피아노에 관해 상당히 열정적인 마음을 쌓아가던 저였으므로, 혼자서 그 교습소로 당장 달려갔고, 선생님이 건네주는 회비 봉투를 엄마에게 갖다 안겨드렸습니다. 선등록 후보고. 엄마는 부모에게 상의도 없이 등록부터 하고 온 3학년 짜리 딸의 일처리 방식을 웃어넘기며, 흔쾌히 피아노 회비를 내주셨어요. 그리고 아빠는 당시 100만 원이 넘는 피아노를 사다 주셨는데, 커다란 '베토벤' 조각상도 하나 피아노 위에 얹어 주셨어요. 쓰다가 항상 피아노 치는 나를 내려다보던 베토벤의 심각한 표정을 떠올리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웃고 있는 중...




피아노를 배울수록 점점...


집안에서 피아노를 배워 본 최초의 사람. 친척들이나 손님이 오면 부모님은 저에게 피아노를 치도록 시키곤 했어요. 심지어 아빠가 운영하던 사업체의 직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회식을 할 때도 저는 피아노를 쳐야 했어요. 


저는 중간중간 틀리곤 하는 제 피아노 실력이 부끄러웠어요. 사람들 앞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 피아노를 치는 경험들은 사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저의 피아노 실력이 아버지의 눈에 흡족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들었고. 저는 스스로의 피아노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내 손이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같다며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지만, 저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아요. 누가 아무리 칭찬해도, 자기 본 실력은 자기가 아는 법이니까요.


나중에 '캐럴 드웩 박사'라는 사람이 쓴 '마인드셋'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가 왜 그런 심리가 생겼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너 혹시 피아노 천재인 거 아냐!'라는 큰 기대, 과한 칭찬 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내가 '피아노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어요.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에 재미가 빠지고, 부담과 조바심이 가득 차 버린 거예요. 


그런 기대나 부담을 느끼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은 자유롭게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고, 피아노를 즐기는 아이들의 실력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는 게 보였습니다. 그런 아이들 중에는 이미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선생님 대신 반주를 하기 시작한 아이들도 있고, 엄청나게 어려워 보이는 빠른 곡으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는 아이도 나오기 시작했어요. 




저의 실질적인 첫 피아노 교습소 선생님, 그 선생님은 참 따뜻하고 좋은 분이었어요. 저는 3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그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예쁜 동화책이 가득한 작은 도서관도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선생님의 어머니도 종종 함께 계셔서 저희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선생님은 여름이 되면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 여름 성경 학교에 초대해 주시기도 하고, 내 생일을 챙겨주시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주는, 한 명 한 명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주던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재적인 실력으로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에 눌려 고통받고 있는 상태였고, 피아노가 다른 친구들처럼 늘지 않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과 질투, 낮은 자존감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 아이들처럼 어린이다운 통통 튀는 밝고 경쾌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부터가 너무나 답답했어요. 저는 아마도 정서적인 고통 가운데 있었고, 제 불안정한 정서적 심리적 상태가 피아노 소리에, 피아노 실력 향상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아이들과의 차이. 모종의 결핍감. 그것을 어린 마음에도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 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을 마음 한편에 확실히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것을 부정할 때 나타나는 그런 흔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타인의 피아노 실력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신랄하게 실수를 지적해 내고, 선생님이 내 재능을 끌어내 키워줄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은 아닐까 의심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학교 친구에게서, 저 멀리 다른 동네 새로 생긴 고급 아파트 단지 앞에 '피아노 교습소'가 아닌 '피아노 학원'이라는 게 생겼고 - 그 차이는 정확히 몰랐지만, 뭔가 운영자의 수준의 차이일 거라고 추측했어요 - , 그 '피아노 학원'의 원장은 유명 음대를 나온 사람으로, 제자들을 예고에 턱턱 합격시키고, 중요한 피아노 대회 입상자를 배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학년 짜리 여학생들 간의 대화였습니다.


저는 학원을 옮겨 멀리까지 다니겠다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집까지 찾아왔고, 원래 선생님을 무척 좋아하고 신뢰했던 엄마는 제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애썼지만, 저는 입을 꾹 다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저는 제가 어린 마음에 품은 생각을 실행해보아야 했으니까요. 선생님을 실력자로 바꾸면 내 실력도 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


새로 바꾼 선생님은 굉장히 차갑고 쌀쌀맞은 분이었어요. 하지만 옮기겠다고 떼를 쓴 건 '나'였으므로 군말 않고 다녔습니다. 새 '학원'에는 학생들이 넘쳐 났고, 피아노를 귀신처럼 잘 치는 아이들 또한 넘쳐났습니다. 예고를 준비하는 부잣집 아이들이 선생님을 독점하다시피 해서, 저는 옛날에 비해 굉장히 푸대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보조 선생님이 대충 봐주는 하루하루가 지나갔어요. 저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더 힘들어졌지만, 전 선생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저에게 옵션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원' 말고는 더 이상 이 지역에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으므로, 저는 이 '학원'에서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동안 정말 미친 듯이 피아노를 연습했어요. 손등에 핏줄이 튀어 올라 울긋불긋 울퉁불퉁해질 때까지 악으로 깡으로 피아노를 연습했습니다. 저를 지켜보던 보조 선생님이 감동을 받아, 원장 선생님을 불러 제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곁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원장 선생님은 저에게 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예고, 예대 준비하는 학생들 봐주는 일이 항상 더 시급했어요. 새 학원으로 옮기고, 콩쿠르 시즌이 되어 모두가 곡을 정하고 연습을 시작했는데, 저의 자격지심이 또 발동하니, 제가 가장 쉽고 재미없는 곡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느끼던 그 시간. 그래도 열심히 연습해서 대회에 나갔어요. 즐기지 않는 연주자, 암울한 마음을 닮은 맑지 않은 피아노 소리. 특별할 것 없는 피아노 실력. 입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피아노에 대한 자격지심은 더 커져버렸습니다.


그때쯤, 엄마는 어느 음대 대학교수를 소개받는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지역에서 상당히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이며 레슨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아노에 대한 내 마음이 진지하다는 것을, '예고'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셨던 엄마는, 그 교수에게 '레슨'을 받아보자고 하셨습니다. 


뭔가 나에게 큰 변화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근거 없는 희망은 쉽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베토벤부터 쇼팽, 리스트까지 모든 곡이 들어 있는 피아노 전집도 샀고, 이제 그 교수님한테 레슨 받으러 다니면서 열심히 연습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 시작은 깔끔하게 세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 레슨을 받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그때의 기분은 그 교수님 앞에서 실력이 없다는 게 더 까발려진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 교수님은 피아노는 잘 치실지 몰라도, 섬세한 사춘기 여자아이의 마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40대 정도 남자분이었어요. 피아노를 잘 치는 다른 언니들과 비교하며 말했고, 열심히 연습하지 않으면 정말 제대로 무섭게 야단을 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꾸역꾸역 연습하며 레슨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그때 그 교수님과 레슨을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연습하던 곡은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이었데, 지금까지 접했던 곡들보다 훨씬 어렵고 빠르게 무겁게 느껴졌지만, 왠지 그런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한 곡을 배우게 된 것이 제 영혼을 충족시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저의 정서 상태와 베토벤 곡들이 잘 맞다는 걸요. 책이 닳도록 죽어라 연습해서 그 곡을 악보를 보지 않고 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고, 저는 받고 있던 모든 레슨을 끊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가가기 힘들었던 너, 다시 찾은 옛 친구


피아노는 저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다가가기 너무 힘들었던, 늘 내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졌던 마음에 큰 고통을 주었던 첫사랑의 상대 같아요. 지금도 피아노를 보면 피아노가 좋고,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너무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와 고통스러워집니다. 그것이 마음에 부담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잊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친구 생각이 어느 순간 떠올랐습니다. 제가 인생의 바닥에서 남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씨름하던 그 시절, 여름엔 아이들을 데리고 유일한 나들이 옵션 동네 수영장에 다녔던 그 시절에 말입니다. 여름이 끝나고 수영장 문을 닫으니 난감한 마음이 들던 때였습니다. 내년 봄까지 나는 무엇에 마음을 두고 지내야 할까 숙제가 생겼습니다. 그때 피아노가 생각났습니다. 마치 오래전 싸우고 헤어졌던 친구지만 문득 마음이 풀려 다시 만나보고 싶은 그런 느낌으로요. 피아노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아노 건반의 묵직한 느낌이 살아있으면서, 가격이 부담이 되지 않는 선의 디지털 피아노를 찾았습니다. $450 (한화 50만 원 정도)에 팔리는 제품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구매했습니다. 그때는 저희 집 상황이 그리 녹록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저는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샀습니다. 다음 해 봄까지 제 마음을 붙들어 줄 닻이 되어 줄 피아노였습니다.


피아노를 산 김에 뭔가 목표를 정하고 이루어 가고 싶었습니다. 한 가지는 '나도 반주를 잘하고 싶다'는 어린 날의 열망을 이루고 싶었고, 또 한 가지는 마지막으로 연습하던 베토벤의 '비창' 전체 곡을 구해 연습을 해 보는 것이었어요. 일단 반주법은 아는 피아노 전공자에게 레슨을 부탁했습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그 사람도 어린아이 셋을 키우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배우는 저도 갓난아기를 업고 배워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30분 피아노 레슨 동안 아이들이 집을 뒤집어엎는 난리가 나곤 했어요. 피아노 레슨이 끝나면 밥을 비벼 먹기도 하면서, 그렇게 '반주 코드'에 관한 음악 공부를 이어갔어요.


그리고 저는 도서관에서 베토벤 악보를 찾아 복사해서, 집에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더듬거리던 손가락이, 매일 반복해서 치자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어요. 혼자서 나만의 독주회를 한다고 생각하며 열정적으로 쳤습니다. 베토벤의 '비창'이라는 곡의 감성은 너무나 그때의 제 영혼과 닮아 있어, 거듭 치고 칠 수록 제 손가락에 제 마음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내가 만든 곡 같은 느낌으로, 어디서 흘러나와도 귀가  번뜩 뜨이는 그런 제 '인생 음악'이 되었습니다.




재미로 치자


이제, 제가 치던 디지털 피아노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고, 저는 다른 옵션들, 할 일들이 많이 생겨서 피아노를 칠 시간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는 피아노가 집 한 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참 뿌듯하고 꽉 찬 기분이 듭니다. 마치 잃어버릴 뻔했던 옛 친구를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으로요. '그때 참 잘 샀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치던 디지털 피아노를 마음대로 갖고 놀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부담 없이 즐겁게 갖고 노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 조금 가르쳐 주고, 연습하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굳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배우는 것도, 손가락 모양을 어떤 형태로 하며 자세를 지키며 치는 것도 저는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새로운 방법,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목적, 새로운 이유를 찾아내기 바라고, 피아노를 갖고 노는 여러 가지 방법, 혹은 피아노를 새로 현대적으로 디자인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나중에도 즐겁게 잘 갖고 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네, 지나가는 피아노 선생님이 들으신다면 기겁을 할 생각인 줄 압니다. 그래도 저는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피아노는 누군가 재미로, 재미를 위해 아름다운 소리를 즐기려고 만든 그 당시 획기적인 신상 악기 발명품이었을 테니까요.  


아이들 뿐 아니라 저 스스로도, 피아노에 대해 제가 잃어버렸던 '재미', 그것을 점점 더 온전히 되찾고, 더 즐길 수 있게 되기를, 인생길에 정말 재밌는 친구로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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