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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Sep 16. 2023

죄와 벌로 얼룩진 삶의 본질을 파헤친 도스토예프스키

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10

가혹한 삶을 이해해야 하는 숙제


실존주의의 창시자, 당대 최고의 소설가, 러시아 문학 최고 거장이라는 말을 듣는 도스토예프스키는 화려한 명성 뒤에 몹시도 감당하기 힘든 기구한 인생과 연악한 심신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자 의사인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7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하지만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성격이 거칠고 무서운 아버지에게서 늘 감싸주는 역할을 해 주셨던 천사 같은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그 충격이 채 다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 마저 농노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다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고 그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도스토예프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 증세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어른이 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내내 가시밭길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문학을 공부하며 이런저런 토론 모임에 참석하다, 당시 시류에 휩쓸려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그 결과로 그는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4년간 지옥생활 그 자체라는 시베리아 유배까지 가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이 모든 혼돈과 고통을 스스로 이해해 내고, 인간의 죽음과, 살인, 탄압과 정의의 의미를 스스로 파악해서 결론 내렸어야만 했다.



이해할 수 없던 소설 <죄와 벌>


나 같은 괜찮은 사람이 누구나 경멸할만한 못된 부자를 죽여 그 돈으로 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면? 이런 생각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즐겨 읽던 청소년기에는 깨닫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는 못된 부자가 죽고, 더 많은 사람이 편해지고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꽤 정의로운 결론이 아닌가 내심 생각했다. 가능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공리주의, 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자는 공산주의에 강한 매력을 느꼈던 기억, '신창원'이라는 고위 공직자 간부 집만 털고 다녔던 의적을 향해 응원의 마음을 품었던 기억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못된 부자들이라는 막연한 대상에 대해 굉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두가 똑같이 누리지 않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불같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진 <죄와 벌> 책 속의 주인공 같은 젊은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아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악독한 고리대금업 노파를 살해하고 나서 보인 다음 행보가 너무나 답답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해놓고 그렇게까지 사람이 망가져 가는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왜 처음에 뜻했던 대로 그 돈으로 공익을 위하고 악인을 무너뜨리는 더 멋진 일을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는 거지? 자신 있게 더 대단한 일을 계획하고 행하지 못하는 거지? 왜 자책하다가 감옥까지 가는 거지? 정말 이상하고 찌질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이름들이 길어서 읽기도 너무 힘든데, 왜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전 세계가 인정하는 대문호로 인정받는지,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읽어보라고 권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안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결코 끼워 넣어 줄 수가 없었다. 멋진 영웅도 기상천외한 서사도 없이, 힘이 쭉 빠지는 비참한 비극으로 날름 미끄러져버리는 이야기로 속 시끄럽고 머리만 아프게 하는 작가의 글은 도무지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 마음에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던 그 책을 얼마 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19세기 러시아라는 나라 그 시대 속에서 1821년부터 1881년까지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 작가의 삶을, 그 삶이 작가 자신에게 내어준 숙제를,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삶의 의미와 본질을 파헤쳐낸 작가의 내면 여정을 보기 시작했다. 세상 풍파를 겪을 만큼 겪고,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과 인간 본성을 조금은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마침내 그의 책에서 보아야 할 것들을 볼 수 있게 '제3의 눈'이 열린 것이다.



마침내 초인 사상과 사람의 본질, 사람에게 필요한 가치를 꿰뚫어 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 1860년대에 '초인 사상'이라는 것이 몹시 유행했다고 한다. 이는 사람의 등급이 초인과 평범한 범인으로 나누어지며, 초인은 대의를 위해 범인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사상으로 당시 엄청난 논란거리였다.  


'내가 초인이라면...?'


그런 생각은 돈 때문에 고통받는 현실에 짓눌려 학교를 쉬게 되면서 우울과 무기력에 잠식되어 버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팔기 시작한 소냐 이야기에 기가 막히고, 돈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팔려가듯 시집가려는 누이를 보는 것이 마음 아프고, 아들의 장래와 온 가족의 안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딸의 희생을 부추기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는 자존심 세고 허세 가득한 가난한 청년에게 유일한 '돌파구'로 다가왔다.


자신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좋은 방향으로 정리해 내는 인신, 초인의 역할을 담당한다면,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구해내고 동시에 이 세상을 위한 정의도 멋지게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저지르는 살인은 범인이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죄가 아니라, 나폴레옹 같은 역사 속 영웅들이 내 조국의 세력을 넓히고 많은 사람에게 안전한 삶의 터전을 보장하기 위해 저지른 전쟁과 같은 필요악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일이 될 수 있다. 초인이 되는 일은 그에게 모든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정의로운 이념과 이상을 이루는 멋진 돌파구가 될 것이었다. 빨간 한복을 입고 제사만 지내면 조상도 내 인생도 다 편안해진다는 '도를 아십니까' 보다 10 배쯤 더 설득력이 있는 한방의 해결법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초인이 맞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초인이란 건 잠시 마음을 혹하고 지나간 허상일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는 그 순간, 내면이 죄의식에 잠식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범인에 불과한 주인공에겐, 그저 돈을 향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몹쓸 짓을 저지른 가난에 몸부림치던 젊은 범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비루한 자괴감에 몸부림 칠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 후 왜 더 힘들어했는지를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가난이라는 감옥보다 더 숨을 옥죄는 더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감옥, 죄의식과 그 죄의식이 불러오는 내면의 사망, 자기혐오와 사회적 단절이라는 인간 내면 속에 설치된 감옥에서 청년은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감옥을 깨고 나오지 않고는 결코 인간답게 주변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도 자유로워질 수 없으니, 그는 결국 그 내면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짓이 정의로운 무엇인 양 합리화하기를 멈추고, 마침내 자신의 죄를 받아 들고 시베리아 유배 감옥생활을 기꺼이 감수했다는 걸 이젠 알겠다. 



소냐와 부활


이 과정에서 엄청난 '내면 구원' 역할을 담당한 소냐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이제야 본다. 소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병든 새엄마, 줄줄이 딸린 어린 의붓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소녀 가장으로. 아직 부모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미래를 꿈 꾸며 배우고 성장해야 할 나이에 매춘의 길로 내몰렸다. 그 덕분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누가 봐도 천박하고 더럽다고 느끼게 되는, 위태롭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참 단단하다. 매일 밤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을 신앞에 내려놓고 신의 자비와 사랑을 구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내면은 수정보다 맑고 바다보다 넓다. 가난에 지쳐 정신마저 병들고, 살인까지 저지른 후, 모든 것을 내면 속에 꾹꾹 숨겨 놓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던 라스콜리니코프지만 소냐를 사랑하고 그녀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도무지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된다. 소냐가 읽어주는 성경말씀이 그의 골수를 쪼개는 듯 한 순간도 더는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게 된다. 마침내 자신이 수전노 노파와 노파의 죄 없는 동생 (소냐와 친하게 지냈던 언니)을 살해했다고 고백했을 때, 소냐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당신 자신에게 왜 그랬는가. 당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였다. 사람을 죽였다는 그에게 공포나 의심을 느끼기에 앞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부터 가늠할 줄 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어가며 그를 끝없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소냐 앞에서, 죽어 마땅한 해충 같은 인간을 죽였다고 생각하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어설픈 합리화가 산산이 부서져 갔다. 처음엔 소냐 때문에 억지로 자수하게 되었다는 억울함과, 차라리 자살을 할 걸 싶은 허세 섞인 미련과, 여전히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고 권력을 차지한 영웅들과 비교해 -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오만스러운 오기와, 함께 수용당한 유형수들에게 받는 조소와 미움이 그를 몹시 우울하고 괴롭게 하여, 강제 노역생활을 하며 중병까지 걸렸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변화한다. 


세상 경멸을 다 받아도 모자랄 것 같은 벌레 같은 삶이라 생각했던 주변 유형수들이 품고 있는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고, 그토록 난폭한 무법자들 모두가 소냐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그녀와 가까운 관계를 맺어가는 걸 보고,  특히 신열에 시달리며 꾸었던 꿈에서 전 세계에 퍼진 질병으로 인류 멸망의 날이 도래한 가운데, 참을 수 없는 불안과 혐오에 미쳐 서로를 마구 죽이는 무시무시한 환각을 경험한 후로, 그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병이 나아 퇴원하였으며, 소냐를 볼 때 자신이 설렌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으며, 소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어느새 엄청나게 자라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운다. 그 자각의 순간이 바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가 다시 태어난 부활의 순간이었다. 자기 신념이라 생각했던 사고와 이론 속에 '심각한 허위'를 깨닫고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과거라는 허물을 완전히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에 이른다. 아직 7년이나 감옥 생활이 남았지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기쁨과 설렘으로 넘치게 행복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가에게 <죄와 벌>  


고통스러운 4년간의 시베리아 유배 생활을 하며, 도스토예프스키가 매일 같이 읽었던 책이 성경이었다고 한다. 도무지 희망이 없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하루하루 속에서, 자신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것은 성경말씀 밖에 없었다 한다. 유배 기간 동안 머릿속에 써 두었던 소설을, 유배가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두문불출하고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소설이 바로  <죄와 벌>이었다. 자신이 몸소 체험하고 깨달은 사람의 내면을 살리는 구원, '진정한 사랑'의 힘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그의 소설 <죄와 벌>이었다.  


왜 스스로 초인의 길을 걷지 못하고, 평범한 범인의 심리에 휘둘려 부자에게 훔쳐낸 금품을 땅에 묻어 버리고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시베리아라는 벌을 택하는 거지 생각했었던 건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고 어린 생각이었다. 죄에는 벌이 따르는 결과가 자연 이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그 행동의 결과 내면 감옥에 홀로 파묻히는 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사회가 발견해서 벌을 내리기 전에 이미 스스로의 내면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는 그 무서운 내면의 벌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죄를 사회에 알리고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고 용서받기를 갈구한 것이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다시 자유를 되찾고, 세상과 다시 소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떳떳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며 인간다운 삶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자신의 태도가 바뀌자 마침내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따스한 온정과 사랑이 깃드는 걸 느끼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삶에 희망이 깃들고 새 삶을 꿈꾸는 미래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이 새 생명을 얻고 부활한 것이었으며, 그 부활은 지극한 소냐의 사랑이 만든 기적, 구원이었다. 소냐의 오래 참는 사랑,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타인 살인'으로 '내면 자살'한 라스콜리니코프를 지옥까지 따라가 살려내고 건강하게 회복해 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소설은 그 시대 정신과 철학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철학 소설'이면서 동시에, 죽었던 내면을 사랑으로 살리는 '극진한 힐링 로맨스'이며, 세상과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한 무모한 청년이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 사람에게 필요한 진짜 가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가는 '성장 이야기'임을 새삼 깨닫는다.  



 <죄와 벌>은, 죄를 계획하고 저지르고 합리화하는데 능숙한 인간의 본성, 그러나 죄를 지은 후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형벌로 더 이상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운명, 그런 인생의 형편을 상기시키고 거기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너무나 중요한 소설이었고, 이는 도스토예프스키 작가 스스로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서 복수와 원한과 혈기를 다 내려놓고, 진실로 내면이 행복해지기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 파헤친 자신을 위한 '구도의 서'였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y (by dvori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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