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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Sep 17. 2023

 방탕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용서를 찾은 톨스토이

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11

다 가진 방탕아 톨스토이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대문호이자 사상가, 개혁가였던 톨스토이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그 업적을 인정받는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태생부터 부와 명성을 겸비한 백작 귀족 가문의 자제였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긴 했으나, 그를 돌봐줄 친척과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공부하고 생활하는데 걸림돌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잔 대학교 법학과를 진학해서 다니다가 중퇴해 버렸다.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너무 부유하고 자유롭게 자라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학업과 커리어에 매진할 열정과 간절함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젊은 날의 그는 쾌락 앞에 쉽게 무너지는 방탕아였으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릴 때까지 이삼십 대를 주색잡기에 미쳐 살았었다고 전해진다.


쾌락추구로 인한 파산 위기도 잠시, 30대 후반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마흔 즈음에 발표한 <전쟁과 평화(1869)> 그리고 연이어 성공을 거둔 작품 <안나 카레니나(1877)> 는 다시 톨스토이에게 대작가 명예,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다시 호화로운 삶을 보장하는 부를 안겨 주었다. 그때쯤 그는 결혼해서 아내도 있고, 13명의 자녀까지 낳은 다 가진 중년 부호가 되어있었다. 문제는 톨스토이가 여전히 성욕 쾌락에 끌려다니는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삶의 의미를 찾는 고민이 더 심각해진 중년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쾌락에 빠졌다가 다시 정신 차리기를 반복하는 그의 삶은 남들 눈엔 그저 넘치게 많이 가진 자, 가진 걸 맘껏 즐기며 사는 부자에 불과했겠지만, 자신을 끝없이 글로 되돌아보는 톨스토이에게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몰고 오는 내면 추락이 반복되는 통제되지 않는 몹쓸 굴레, 돈과 명예로 만든 지옥이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자신을 돌아보는 집필을 멈추지 않았고, 고령의 나이에도 <부활(1899)>이라는 전 세계 만인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자신에게도 마침내 평안을 주었을 작품을 완성해 내기에 이른다. 



<전쟁과 평화> 속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는 사실주의 역사소설로, 톨스토이의 패기 넘치는 젊은 이상이 드러나는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0대 후반부터 6여 년에 걸쳐 집필한 <전쟁과 평화>를 통해 톨스토이는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았던 역사, 러시아가 승리하고 적을 물리쳤던 역사를 살펴보며, 누가, 무엇이, 왜, 어떻게 승리의 근원이었나를 탐색한다.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유럽 역사에서 카이사르 이후 최대 정복자라 불리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의 오만함을 조명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쿠투조프 러시아 사령관이 이끄는 "운명에 유순하게 순종하는" 러시아 농민 병사들을 대립하는 주인공으로 조명한다. 유럽 전체를 휩쓸고 다니며 새 역사를 쓰던 패기만만한 나폴레옹 군대를 러시아에서 몰아낸 것은 '민중'이며, 민중이야 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라고 마침내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주인공 안드레이 보르콘스키 공작은 집안 좋고 지적이고 교양 있는 매력적인 인물이나, 남의 실수에 매정한 다소 오만한 인물이다. 나타샤에 반해 약혼까지 하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나타샤가 다른 남자의 유혹에 빠지자 안드레이는 단호하게 그녀와의 관계를 접는다. 또 다른 주요 인물 피에르는 서자 사생아 출신에 외모도 몸가짐도 어딘가 부족해 보이지만 그는 감정에 더 솔직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마치 안드레이는 이성의 아이콘, 피에르는 감성의 아이콘인 것만 같다.  


이성이건 감성이건, 전쟁은 모두를 휩쓸어 생명을 위협하는 재주를 가진 재앙이다. 전쟁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 자신이 버렸던 나타샤가 죽을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은혜를 입은 안드레이도, 나폴레옹 암살을 기도하다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마침내 구출된 피에르도, 두 남자 모두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소중한 것들을 잃고 수없이 목숨을 위협받은 후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대상에 상관없이 서로를 향해 품는 연민과 사랑이야 말로 신이 이 땅 위에 바라는 가장 의미 있는 것임을. 그것이 죽었던 마음을 다시 살려내고 극복시킬 수 있는 묘약임을 말이다. 그리고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들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으며 소설은 끝난다. 이 모든 깨달음은, 마침내 글에 매진하기 시작한 톨스토이가 기나긴 내면 여정 속에서 찾아낸 한줄기 희망이었다. 톨스토이 자신이 현재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전쟁통에 죽어가는 참혹한 지경은 아니며, 자신이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신의 뜻, 그 희망을 따라가 보겠다고.



<안나 까레니나> 속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고 8년 후에 출간한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 톨스토이의 삶은 여전히 쾌락을 좇는 본성을 거스르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안나 까레니나>에 나오는 남자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귀족 부호 알렉세이 카레닌 (안나의 남편), 더 이상 아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람피우고 다니는 다자녀 아빠인 오블론스키 (안나의 오빠), 그리고 백작 귀족 가문이 보장해 주는 명예와 부에 잘 생긴 외모까지 매력이 철철 흐르는 몸으로 이 여자 저 여자 마음 내키는 대로 집적거리고 다니다, 급기야 유부녀 안나에게 빠져 삶을 다 탕진해 버리는 브론스키 (안나의 정부) 모두 톨스토이 자신을 그리고 있다.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 부유한 귀족 남자들의 삶과 가치관 속에서, 톨스토이의 위선과 욕구, 도저히 없앨 수 없는 방탕한 기질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어른 남성들만 톨스토이를 그리고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톨스토이 내면 자아와 같은 인물은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 주는 엄마를 하루아침에 모르는 남자에게 뺏긴 안나의 아들, 8살짜리 어린 세료자일지 모른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는 한 줄 문장으로 끝나는 톨스토이의 어린 시절은 돈과 명예로도 해결되지 않는 큰 결핍감을 낳았고, 그 가슴속 빈 구멍이 지나친 여성 편력, 여성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소설을 쓰며 톨스토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성찰하며 성장해 나갔던 것 같다. 무엇이 자신을 탕아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런 탕아를 키우는 사회를 분석하고, 내면에 뿌리내린 책임을 모르는 방탕한 문화가 허락한 러시아 귀족의 타락을 직시했다. 또한 지독한 사랑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사랑하는 자식까지 떠나온 안나가 날이 갈수록 질투와 원망, 의심에 시달리며 브론스키와 불화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키티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얻고 원하던 단란하고 이상적인 삶을 이루어가던 레빈이 쉽지 않은 결혼생활에 노심초사하며, 형의 죽음이 몰고 온 존재에 대한 풀리지 않는 철학 고민으로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 모습에서, 다 가진 톨스토이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자신의 방탕한 삶이 자초하는 아내와의 불화에 불행해하는 모습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그럼에도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안나와 함께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 레빈이라는 인물은 톨스토이가 되고 싶은 모습이며, 레빈이 이끌어 가는 삶은 톨스토이의 이상인 듯하다. 레빈 또한 귀족 지주의 아들로 방탕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오래 마음에 품었던 여인 키티와 결혼하며 자신의 지난날 잘못을 다 고백하고 아내와 시골에서 농민들과 함께 일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내면 고통이 있음에도, 농사일에 더욱 매진하고 형제 같은 농부들을 돌보며 매일매일 주어지는 삶을 개척해 나가는 그 삶을 꾸준히 이어간다. 톨스토이는 그와 같은 청빈하고 단순 소박하며 성실한 삶을 염원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의 아내를 포함해서 주변 사람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톨스토이에게는 금욕과 성실이 자신에게 너무나 부족한 결핍이어서, 쓰는 글마다 거듭 강조해서 언급하며 그토록 채우기를 갈망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의 소설마다 주인공이 농민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그 삶을 동경하고 아름답게 신성시 여기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작품마다 소박한 농민의 삶을 강조해 온 그가 실제로는 몹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고, 급기야는 자신의 소설 판권을 다 포기하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르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의 뜻과 같지 않았기에, 계속 부부 불화에 시달렸고 그 불화가 그의 객사를 부른 가출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레빈은 마침내 깨닫고 결론 내린다. "좋은 삶이란 영혼과 진리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그러니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매 순간 사랑과 선의로 대하리라"라고. 이는 바로 <안나 카레니나> 글쓰기 여정을 통해 내린 톨스토이 작가 자신의 결론이었다. 점점 더 기독교 신앙으로 깊이 들어가는 톨스토이를 발견할 수 있다. 



<부활> 속 톨스토이 


부활은 톨스토이가 인생 말년 1899년, 70이 넘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네흘류도프 공작이라는 귀족 남자. 이 남자 또한 톨스토이 자신이다. 그는 청년 시절 고모집에 만난 16세 소녀, 카튜사를 유혹해 동침하곤 곧 떠나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의례히 돈 있고 힘 있는 귀족 청년들은 다들 그렇게 그보다 더한 일을 벌이며 방탕과 쾌락의 삶을 좇는 것을 보니, 어린 소녀를 상대로 한 자신의 무책임한 욕구 해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져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았다. 이러한 소설의 도입부는, 쾌락에 빠져 살면서도 잘못인지 몰랐던 자신의 젊은 날을 고발하는 작가의 진지한 고해성사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된 그는 그 재판이 자신이 동침했던 카튜사가 살인과 절도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가 자신과의 동침 결과로 임신을 했었고, 그 때문에 고모집에서 쫓겨나 결국은 아이도 잃고 하녀 생활을 전전하다 창녀의 삶을 사는 존재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남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욕망과 쾌락이 이끄는 대로 방탕하게 살았던 삶이 이끌어간 처참한 결과에 뼈아픈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무죄가 틀림없어 보이는 카튜사가 유죄 선고를 받는 것을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고, 카튜사를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그리고 카튜사의 구명을 위해 원로원에 상소를 올리고 황제에게 청원서를 내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본다. 하지만, 상소는 기각되고 카튜사는 재판 판결대로 4년 중노동형을 살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나야만 한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카튜사를 끝까지 돕고, 카튜사와 결혼하여 그녀를 타락에서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베리아로 따라가는 희생을 한다. 시베리아로 함께 가서 카튜사를 보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중노동형을 살며 병들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부당한 고통을 본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회 전체의 모습에 눈뜨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결국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고, 황제로부터 그녀의 사면장을 받아낸다. 마침내 카튜사가 네흘류도프의 진정한 뉘우침과 희생에 감복하고 그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되지만, 그를 아끼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그녀는 감옥소에서 만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 지난날 잘못에 대한 책임감이나 희생이 아닌 -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마침내 인연이 다 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소설의 마지막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카튜사와 마지막 만남을 갖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성경 - 마태복음 -을 읽으며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에 대해 죄 사함 받은 죄인임을 매 순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럴 때에만 - 자신이 용서받은 인간임을 자각할 때만 - 인간이 타인의 실수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것. 한 번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없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진짜 사회는 법과 제도로 사람의 죄를 따지고 벌주는 그러면서 법을 휘두르는 높은 사람이네 뽐내는 자신들은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한 그런 사람들이 만들에 가는 게 아니라는 것. 타인을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는 것. 


깨달음을 얻는 네흘류도프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자신과 타인을 겸허한 마음으로 끝없이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 그 용서가 사회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라 얻은 깨달음, 죄성을 뿌리칠 도리 없는 처지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톨스토이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심취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죽기 며칠 전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톨스토이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내면 여정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젊은 날의 쾌락주의자 성향이 평생에 걸쳐 그를 따라다니며 수시로 그를 무너지게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소설 속에서 끝없이 스스로의 삶을 다시 세우고 채우며 자신이 바라는 삶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했던 '용서'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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