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고 많은 나라 중 왜 멕시코를 택했을까
휴직이 결정된 후 가족들과 친구들, 직장동료들이 나한테 물어봤던 공통질문이 있다.
"그래서 휴직하고 뭐 할 거야?"
"휴직하고 여행 갈 거예요."
"어디로?"
"음 고민 중이긴 한데, 아마 멕시코로 갈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99%의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멕시코'하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이 질문에 구구절절 설명하기 일쑤였다. 그 논리를 설명하면,
1. 이왕 휴직했으니 지구 반대편 나라로 가고 싶다.
2.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대륙으로 가고 싶다.
3. 그러면 중남미와 아프리카가 남는다.
4. 이 중 아프리카는 너무 하드코어 하니 중남미로 정했다. (사실 중남미도 하드코어 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5. 내가 휴직했을 당시 페루, 브라질 등 남미 주요국으로 가는 육로국경이 시위로 인해 막힌 상태라 중미의 멕시코로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멕시코를 선택한 이유는 친한 언니가 나에게 보여준 여행사진 때문이었다. 그 언니는 나와 마찬가지로 IT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나보다 6개월 전에 휴직을 해 2달간 남미여행을 갔다 온 상태였다. 그 언니가 휴직하겠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언니한테 왜 휴직하냐고 물었고, 언니는 나에게 아래와 같이 짧게 대답했다.
그냥, 쉬고 싶어서
그 당시에는 그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간 질풍노도 같은 시기를 보낸 후 휴직을 결정했을 때에야 언니의 말이 이해되었다. 휴직한다고 말했을 때 언니는 나의 결정을 누구보다 응원해 주었고 나는 1월에 언니가 보내준 사진이 불현듯 생각나 멕시코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멕시코의 사진도 나의 결정에 한몫했으나, 그 당시 휴직을 한 언니의 상태가 너무 평온해 보이고 자기만의 기준이 뚜렷해 보여서 언니처럼 나도 내 인생의 방향성을 찾고 싶어 멕시코로 결정했던 것도 있다.
사실 그다음에 멕시코 여행을 짜는 건 굉장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휴직사실을 팀에 공유한 후 더 이상 나에게 큰일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나는 휴직 전 남은 2주 동안 야근에서 벗어나 퇴근 후 시간을 온전히 멕시코 여행계획에 쏟을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두근거렸고, 나름 여행을 많이 다니고 외국에서 살았음에도 중남미는 처음인지라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멕시코를 공부해 갔다.
그리고 휴직일이 다가왔고, 멕시코에 미쳐있던 그 당시의 나는 빨리 쉬고 싶어 개인휴가를 써서 휴직일을 일주일 당겼다. 멕시코는 내 마음의 도피처였고, 멕시코 여행 외에 나는 모든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으며, 회사에 있으면 내 안의 무언가가 닳고 닳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업무를 마무리한 그다음 주 월요일 주간 회의에서 나는 휴직일을 당기겠다고 말했고, 그때 내 상사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러면 남은 하루동안 무엇을 하는 데에 집중할 건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의 퓨즈가 끊겼다. 그분이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저 문장만 보면 그리 심한 말도 아니지만, 조직의 경쟁적인 분위기에 너무나 지쳐있던 나는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그리고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이 조직은 내가 50을 해오면 100을 해오라고 할 것이고, 100을 해오면 120을 하라고 할 것이고, 120을 하면 200을 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그 기대치는 결국 남(조직)의 기준이며, 내 평판보다는 내 정신건강을 우선시해야겠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이전까지는 주간 회의에서 상사나 팀원들이 내 결과물이나 퍼포먼스에 의구심을 표현하면 반박을 해서 그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거나 의견을 꺾었다면, 그날은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했다.
"음, 딱히 오늘 하고 싶은 일은 없는데요."
"오늘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내 마음속에서는 '인수인계도 다 했는데 도대체 왜?', '진짜 왜 그러냐고 항의할까', '마지막날이니까 티타임 한다고 해볼까' 등 여러 말들이 맴돌았지만 그냥 짧게 대답했다. 어른들은 내가 정신 나갔다고 할 수도 있고, 되바라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내 최선이었다. 그렇게 주간회의가 끝났고, 나는 오후에 있던 회의에 불참 표시를 누른 채 저녁까지 회사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내 휴직생활은 시작되었고, 나는 마지막 한 주간 멕시코 여행을 준비했다.
나의 멕시코 여행은 계획적으로 준비했으면서도 매우 충동적으로 결정된 것이기도 했다. 3주의 시간 동안 나는 항공권, 숙소, 여행일정 짜기, 동행 구하기 등 모든 사항을 계획적으로 준비했고, J형 인간답게 결국 여행 하루 전에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사실 약간 불안하긴 했다. 여행은 많이 다녔으나 스페인어를 못하기에 말이 안 통하는 여행지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며 자기 효능감이 바닥인 상태였고, 난이도 있는 여행지에서 약간의 고생을 하더라도 나의 힘으로 온전히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여행 하루 전날 밤, 약간의 설렘과 떨림을 안은채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