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1) - 멕시코의 첫인상
36박 37일 여행의 시작
멕시코 하면 대부분 마약, 카르텔의 나라 등 위험한 지역으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멕시코 여행을 마친 지금도 멕시코는 위험한 나라라는 데에 이견은 없으나, 관광지 위주로 다니고 밤늦게 안 돌아다니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피할 수 있으며, 중남미 국가 중 오히려 관광객 대상 치안은 나은 편이라 생각한다. (물론 100% 장담은 못 한다. 관광지 외곽지역에서는 총기 사고 등 여러 사고가 터진다.) 또한, 멕시코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마야 유적지 +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경관 + 매우 맛있는 음식 등 매력적인 요소가 너무나도 많아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여행지이다.
하지만, LA를 경유해 이제 막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졸아있었다. 치안 때문에 40만 원 비싼 항공권을 구매해 새벽이 아닌 오후 5시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그 당시 나르코스의 열혈팬이었던 나는 공항에 있는 사람들 중 카르텔이 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TSA 자물쇠가 야무지게 채워진 힙색을 껴안고 모두를 경계하며 유심칩을 사러 공항 편의점 OXXO(옥소, 우리나라 씨유 같은 국민편의점)에 갔으나
"Tiene USIM?(유심칩 있니?)"
"????"
아니나 다를까, 5일 속성으로 배운 스페인어가 통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구글신의 번역기를 통해 무사히 유심칩을 샀다. 그렇게 산 유심칩으로 우버를 불렀고, 한국에서 출발한 지 장장 20시간 만에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잡은 호텔에 도착해 침대에 뻗었다.
D+2
너무나도 배고팠던 나는 새벽 4시에 잠을 깨 식당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호텔 근처 브런치 식당에 멕시칸 요리를 먹으러 향했다. 그렇게 나온 아침 거리는 생각보다 유럽 같았다. 영화 코코에서 나오는 알록달록한 집 대신 장식적인 창문이 달려있는 유럽풍 건물이 많았고, 그렇게 도착한 브런치 카페도 한국 성수동에 있을법한 인테리어였다. 아침식사로 시킨 엔칠라다(enchilada)는 정말 맛이 없었고, 가격은 팁포함(25,000원) 330페소 정도로 비쌌지만, 좋은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다는 사실에 합격점을 주었다.
그렇게 나온 후, 아침산책을 하고 싶어 택시로 25분 거리에 있는 차풀테펙 성(Castillo de Chapultepec)에 갔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기 좋다고 해서 간 차풀테펙 성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전망이 좋은 것은 둘째 치고, 생각보다 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이 기대이상이었다.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시기와 독립전쟁 시기를 거쳤다는 점, 그리고 이후 근현대 민주항쟁을 거쳐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은근히 있다. 나름 역사학도로서 오랜만에 전공을 살려 흥미롭게 박물관을 관람했고, 중간중간에 있는 유물과 미술작품들이 '아니 얘가 왜 여기서 나와' 급으로 퀄리티가 좋아서 의외였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박물관을 갈 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오전에 차풀테펙 성을 관람한 후 시차 때문에 호텔 침대에 뻗은 나는, 오후 4시 즈음 느지막하게 구시가지 중심지인 소깔로(zocalo) 광장으로 향했다. 소깔로 광장에서 예술궁전(Palacio de Bellas Artes)을 보고 메트로폴리탄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la Ciudad de México)으로 향했으며, 1시간 반 만에 3개의 관광스폿을 클리어했다. 예술궁전과 성당은 아름다웠고, 안에 있는 예술작품도 매력적이었으나, 이때까지 멕시코시티는 나에게 유럽의 한 도시정도로 느껴질 정도로 내가 생각한 멕시코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조금 실망한 상태였다.
그리고 저녁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광장 근처에서 쉬던 중, 어떤 의식을 보게 되었다. 돈을 내면 원주민 주술사가 사람 위에 연기를 뿌리며 액운을 날려주는 느낌의 퍼포먼스였다. 내가 오리엔탈리즘적으로 멕시코를 바라봤던 것도 있겠지만, 유럽 같은 모습에 실망했던 나는 이국적인 모습에 불현듯 눈길이 가서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탄력을 받아 주변을 둘러보니 생뚱맞게 도시 한복판에 피라미드가 등장했다. 이름은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로, 아즈텍 문명의 신전이 일부분이나마 남아있었다. 이 신전은 죽음의 신을 섬기기 위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멕시코가 마야와 아즈텍 문명 영역과 겹치기도 하고, 멕시코 시티 지역이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츠티틀란(Tenochtitlan)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멕시코시티 중심부와 외곽 곳곳에 유적이 퍼져있다. 이걸 보니 내가 멕시코에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리고 저녁에 한국에서 미리 구한 동행분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이름은 Balcón del Zocalo로, 맛집은 아니지만 뷰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름 근사하게 나온 타코를 그냥저냥 먹은 후 발코니에 가 야경을 보며, 멕시코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멕시코는 야경이 찐이다.
하염없이 야경을 구경한 후, 동행분이 강력추천해서(?) 멕시코시티 추로스 맛집이라는 El Moro 본점에 갔다. 맛집답게 저녁 9시가 되어서도 사람들이 붐벼 10분 정도 웨이팅을 해서 들어가서 먹은 추로스. 멕시코 여행 통틀어 가장 맛있는 추로스 집이었다. 나는 소화기관이 좋지 않아 자의 반 타의 반 소식을 지향하지만, 이 날 추로스는 흡입했을 정도로 꿀맛이었다.
이후, 우버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기사님의 'Buenas Noches(좋은 밤)', 'Hasta Luego(나중에 또 봐)' 등 친절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들으니 멕시코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