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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쟤 Apr 22. 2023

FOMO를 차마 버리지 못한 채

멕시코시티(2) - 성당과 피라미드와 타코와 데낄라와 함께 한 14시간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멕시코시티(1) - 멕시코의 첫인상




나는 또래들 중에서는 나름 해외여행을 많이 한 편이다. 교사였던 우리 엄마는 방학 때마다 어린 나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녔고, 이 당시 '여행 조기교육'의 여행으로 대학생 때는 친구들이 동아리와 학회활동을 할 때 해외여행을 떠나 한국에 머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내가 엄마에게 가졌던 한 가지 불만이 있었다. 엄마는 어느 나라에 여행 가기로 다짐하면, 약 4개월 전부터 그 나라에 대한 모든 지식을 쌓고자 노력했다. 일례로 러시아 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학교 도서관에서 러시아의 문화, 미술, 역사서적을 대여섯 권 빌려왔었다. 러시아 여행을 갈 즈음에는 가이드급 지식으로 무장해 있었고, 관광지에 가서도 남들의 2~3배 되는 시간을 유적지 감상에 쏟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FOMO(Fear or missing out,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뜻한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반발심 때문일까, 나는 여행할 때만은 여행지에 대한 지식보다는 그 순간의 풍경과 분위기를 더 중시하곤 했다. 엄마가 3시간 동안 박물관 도슨트를 들을 때, 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어떤 작품에 꽂혀 20분 정도 멍하니 감상하곤 했으며, 역사학도였지만 역사적 문화유산에 방문하면 은근슬쩍 가이드의 해설보다는 그 옆에 있는 풍경을 즐기고는 했다.


하지만, 소중한 휴직기간에 여행을 와서 그런 걸까, 멕시코시티에 2박 3일만 머물러서 그런 걸까. 이번만큼은 나도 엄마처럼 FOMO에 휩싸여 내일이 없는 듯이 모든 것을 흡수하고자 했다.



D+3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 투어가 있는 날, 슬프게도 나는 한국에서 업무 연락이 와 새벽 4시에 깼다.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줌 미팅을 한 후 8시 투어장소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약속장소에 가 동행을 만난 후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 날 나는 본격적인 여행객의 자세로 무장한 상태였다. 장래 유튜버가 되기 위해 고프로도 야심 차게 가지고 왔으며, 영어 가이드가 있는 투어인 만큼 모든 설명을 듣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영어 가이드는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스팽글리쉬(Span-glish)를 구사했고, 나는 약간 마음을 비운 채 투어를 시작했다.


처음에 멕시코 시티의 Tlatelolco 지역을 갔다. 이곳은 3가지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 아즈텍의 피라미드가 세워졌던 도심지였고,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해당 피라미드의 돌을 빼와서 세운 성당이 있었으며, 20세기에 멕시코 68 운동을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을 대학살 한 뜰라땔롤꼬 학살(Tlatelolco massacre)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아즈텍 피라미드와 스페인 정복자가 세운 성당, 그리고 68년 반정부 평화시위를 기리는 기념비


투어를 신청하지 않았으면 몰랐을법한 멕시코 유적지를 들린 후, 세계 3대 성모 발현지인 과달루페 성당(Basilca del Guadalupe)으로 향했다. 성당 이름의 주인공인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의 민족성과도 연결되는데, 과달루페 성모는 이전부터 황갈색 피부에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이후 1810년 멕시코 독립전쟁 당시 멕시코 독립군은 과달루페의 성모가 그려진 깃발 아래 싸웠다. (출처: 위키백과) 이전까지 과달루페 성모는 가톨릭에서 '공식 성모'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1895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며 과달루페 성당은 멕시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다.


입구에 들어가면, 신부님이 성수를 몸소 뿌려주신다. 이후 홀리한 마음을 가지고 입구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큰 공터에 현대식 성당과 옛날식(?) 성당이 공존한다. 멕시코시티는 지반이 약해 땅이 점점 침식되고 있다. 그래서 성당 본당이 점점 기울자, 1970년대 옆에 본당을 새로 설립했다. 현재 대부분의 예배는 새로 설립된 본당에서 진행되고 있다.


과달루페 성당 입장시 계신 신부님(1). 현 본당과 구 본당(2,3). 현 본당에서 진행되는 미사(4)와 언덕위에서 본 멕시코 정경(5)


첫 번째 유적지는 좀 심심했는데 과달루페 성당은 나에게 합격이었다. 하지만, 내 진짜 목표는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였기 때문에 1시간 반 동안 이동할 때 숙면을 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 왔는데 새벽 4시에 일한건 좀 아니었던 것 같다.


문득 잠에서 깨 창문을 보니, 고산지대인 멕시코 시티답게, 산 중턱까지 형형색색의 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내가 멕시코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와중 가이드 설명을 들어보니, 아까 지나간 곳은 멕시코 빈민가라고 했다. 이동수단은 케이블카로 이용료는 단 돈 500원. 산중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심지만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받지 못한 채 케이블카로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니 바로 빈부격차가 느껴졌다.



그리고 피라미드에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피라미드가 아닌 가게 앞에 멈췄다. 마침 시간이 12시를 지나고 있어서 점심식사 장소인가 했더니, 비가 와서 피라미드 관광 전에 데낄라 투어를 먼저 진행한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도 점심 전에 데낄라를 마시자는 멕시코 사람의 마인드와 간에 감탄만 나온다.


방식은 전형적인 패키지 투어답게, 가게 직원이 데낄라 맛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마음에 들면 옆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한 병 구매하는 식이다. 근데 흥의 나라 멕시코 사람들답게 건배할 때도 굉장히 흥겹게 했는데, 잔을 위아래로 돌리고 원을 몇 번 그린다음에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멕시코 덕담을 몇 마디 한 후, 'Salut(건배)!'를 외치며 원샷을 때린다. 그렇게 공복에 데낄라를 훅훅 마시니 나는 알딸딸해졌고, 서비스로 가게 주인이 아가베로 만든 전통주인 풀케(Pulque)가 달달해 내 맘에 들어 2-3잔 마시니 취하고 말았다.


멕시코 데낄라 투어(판촉행사)의 현장과 풀케. 2번째 사진 우측에 높게 솟아있는 녹색 식물이 아가베(agave)다.


그렇게 선 음주, 후 식사를 하러 갔다. 동행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에서 내 옆동네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 흥겹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 식당 안에서 갑자기 공연이 시작되었다. 엄청 큰 머리장식을 한 아주머니가 이곳저곳을 누비며 아즈텍 전통춤을 추고 있었고, 춤을 다 춘 후에는 어김없이 공연료를 수금하러 돌아다녔다. 공연료도 공연료인데, 느닷없이 전통춤을 보게 되어 약간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점심식사로 갔던 식당과 식사들. 그리고 식사 도중 춤을 추는 가게 직원분까지.. 삘로 살자.. 멕시코 사람들처럼..


술로 알딸딸해지고 점심식사 장소에서 얼떨떨해진 채,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으로 향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인 테오티우아칸은 엄밀히 말하면 아즈텍 유적이 아닌 어떤 부족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스텍족이 이곳을 점령한 후, 이 피라미드를 의식이 행해지는 신성한 장소로 지정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테오티우아칸에는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있었다. 테오티우아칸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부족 간에 세력다툼이 있었으며, 피라미드 달, 태양 세력 간의 전쟁도 벌어졌다고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지만 피라미드의 규모를 보니 그 거대함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80페소(5,600원)짜리 우비를 입고 찍은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태양의 피라미드가 체감 4-5배정도 큰듯 하다.


그렇게 내 영혼을 영끌해서 투어를 다니니 어연 오후 4시였다. '미친 일정을 소화한 내가 자랑스럽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가이드가 시간이 남았으니 다른 피라미드를 또 가자고 했다. 와 이건 못 가겠다 싶었는데, 옆에서 동행친구가 나를 자극했다.


"저는 원래 FOMO가 있는 성격이라 가려고요."


나도 '한 FOMO'하는 성격으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피라미드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유적지와는 다르게 너무나 새로워서 흥미가 생겼고, 심지어 피라미드를 올라갈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달과 태양의 피라미드는 코로나 이후로 올라갈 수 없다). 그렇게 간 피라미드의 이름은 '뱀의 피라미드'로 흡사 고구려 고분지 무덤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구면인듯한 뱀의 피라미드를 올라가 보니, 저 멀리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가 보였다. 역시 오르는 건 힘들지만, 올라간 후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뱀의 피라미드와 피라미드의 부조, 그리고 뱀의 피라미드에 올라가 바라본 테오티우아칸의 모습


그렇게 투어가 끝난 후, 동행친구와 나는 넷플릭스 타코 연대기에 나온 곱창타코집 Taqueria El Torito에 갔다. 체력은 방전되었지만 맛있는 건 포기 못한다는 동행친구의 주장에 감화되어 구시가지 근처에 있는 타코집에 갔으며, 여기에서 나는 멕시코 여행 통틀어 인생 곱창타코를 만나게 된다. 나는 Tripa를, 친구는 Tripa(곱창), Suadero(소고기살), Campechano(모둠)를 먹었는데 Campechano가 제일 맛있었고 Tripa이 두 번째로 맛있었다. 여기는 대대손손 장수해야 하는 맛집이다.



그리고 술 한잔 하러 칵테일바 handshake speakeasy로 갔다. 원래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어떤 사람이 취소를 해주어서 멕시코시티 마지막 날 힙한 장소에 갈 수 있었다. 내일이면 헤어지는 친구와 칵테일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멕시코시티의 마지막 저녁을 완벽하게 보낼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들어오니 어연 저녁 10시. 멕시코시티를 이틀 만에 씹어 먹겠다는 마음으로 돌아다녀 매우 피곤했지만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섭렵해 마음만은 풍족했던 하루였다.


handshake speakeasy. 두 번째 음료가 맛있고 세 번째 음료는 시그니처인데 베이스가 데낄라가 많이 들어가서 굉장히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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