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과 육아의 의무가 지워지지 않은 아내를 바라보는 양가적 감정에 대해
아내는 오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서울 강남에 있는 회사 본사에 아홉 시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고속버스를 여섯 시 반에 타야 하기 때문이다. 넉넉히 잡아도 세 시간이 걸리는 출근길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잠이 많은 아내가 (물론 그녀는 저녁잠도 많다) 억지로 눈을 비비며 일어난 것이다. 새벽 여섯 시 반, 아내로부터 무사히 버스에 탑승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쌍둥이의 월요일 등원길을 혼자 준비했다. 아침밥을 해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힌 뒤 어린이집 가방과 낮잠 이불을 든 채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 실었다. 30분이 넘는 출근길을 통과하여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연구실에 도착하니 아홉 시 반이었다. 그 시간 아내는 막 회사에 도착하여 출근 첫날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가 받은 오퍼는 6개월 계약직이었다. 2018년 퇴직하기 전까지 회사에서 담당했던 업무였고, 해당 업무를 인수받은 동료가 최근 출산을 앞두고 있어 육아휴직 대체직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내가 제시받은 업무였다. 다행히 원거리에서도 수행 가능한 업무였기에 주 5일 재택근무에 합의했지만, '회사의 요구에 의해 본사로 출근할 수 있다'는 규정이 계약서에 추가되었다. 가끔 출근해야 할 때에는, 오늘 겪은 것처럼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이 넘게 고속버스를 타야 하거나 대중교통을 세 번쯤 갈아타는 것을 감수하고 기차를 타야 한다. 통근 시간 총 5~6시간. 하지만 아내는 받아들였다.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18년 내가 지방에 있는 한 대도시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제시한 교수직을 승낙했을 때, 아내는 큰 미련 없이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위에 이야기한 그 업무를 매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금호동에 살고 있었다. 연애하던 시절 '혹시나 결혼할지도 몰라서' 두 명의 근무지 중간에 살 곳을 구했다. 당시 나는 여의도에, 아내는 강남에 있는 회사에 재직 중이었다. 매일 아침 금호역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떠나는 지하철을 타며 헤어졌는데, 어느 날 옥수역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탄 아내의 얼굴이 흙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후 무거운 마음이 계속 남아있었다. 당시 아내는 업무가 힘든 나머지 역류성 식도염까지 걸린 상태였다. 밤에 쉽게 잠들지 못했고, 퇴근하면 가만히 누워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사표를 제출할 수 있는 상당히 좋은 명분인 주거지 이동 가능성이 발생했고,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아내는 회사를 떠날 수 있었다.
그때에는 이토록 오래 일을 쉬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날에 대한 별다른 계획이나 걱정 없이 당분간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며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하자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서울을 떠난 우리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2년여의 기다림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주거비용과 인구밀도, 상대적으로 원활한 교통과 만족스러운 대기의 질까지,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는 서울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 -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외벌이로 모든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 등 - 꽤 힘든 초반 육아 시기를 보냈다. 지금은 어린이집에서 업무 시간 중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아이들도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에 조금은 수월해진 느낌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얼굴을 조금 여유 있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경력 단절에 대한 아내의 고민 역시 본격화되었다.
두 명의 아이를 가진 부부가 맞벌이를 할 수 있는가, 혹은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의 성향과 처한 환경에 따라 답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아내와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몇 군에서 엇갈렸다. 나는 굳이 아내가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육아에 올인하여 개인의 커리어를 완전히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에는 반대했다. 빠듯하긴 하지만 가족의 재정상황이 당장 아내를 일터로 내몰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바랐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는 두 가지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나의 어머니가 평생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과정에서 당신이 느낀 회환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누나와 나를 키우고 아버지를 보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았고, 그 모든 것에서 '은퇴'한 뒤 자신에게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어머니는 성당과 관련된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목공, 첼로와 수채화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지만, 그것들이 어머니의 '커리어'를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어머니와 나 모두 나의 배우자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째 요인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나로부터 온 경험이었다. 현재 재직 중인 대학교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직장'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최고의 '직업'인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강의와 연구, 보직 수행과 대외 활동 등 교수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다양한 활동에서 큰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 가족의 생계를 오롯이 책임지는 스트레스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해소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수입을 위해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그나마 재미있게 할 수 있으니, 이보다 큰 행운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느낀 행복을 아내도 느끼길 바랐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은 미묘하게 달랐다. 우선 아내는 일과 직업이 삶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갖지 못하는, 일과 개인의 삶을 꽤 엄격히 분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무엇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 채 사회로 내몰리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 역시 어린 시절부터 진로 탐색 과정에서 방황을 많이 한 편이다. 어린 나이에는 음악 쪽으로 꿈을 키웠지만 외적인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술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지만 전공 관련 직장을 구하는 것에 실패했다. 낙심한 채 우연히 방문한 싱가포르에서 전공과 무관한 업무를 제시한 기업에 취직했고, 그곳의 경력을 발판으로 한국에서 비슷한 업무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나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아내가 지금까지 쌓은 경력은 본인이 정말 원해서 쌓은 것이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해, 혹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하게 된 측면이 강했다. 아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아내에게 더 중요한 것은 퇴근 이후의 일과와 주말의 계획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수입이 필요하고, 그래서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충고하는 것은 조금 결이 맞지 않는 일이다. 마침 아이들이 태어나 긴 육아의 시간을 가지게 됨에 따라, 우리는 틈이 날 때마다 아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내 본인과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 중 미국에서 전업 화가로 성공하여 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도 큰 자극이 된 듯 보였다. 그 친구의 작업실에 가서 어깨너머로 그림 그리는 솜씨를 배우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 도시로 내려온 후, 내가 재직 중인 학교의 평생교육원에서 꾸준히 유화를 배우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생각할 때, 궁극적으로 미술대학원에 진학하여 순수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뒤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것이 그녀와 우리 가족의 행복을 고려할 때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
나는 그러한 아내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 줄 용의가 있었지만, 우리의 양손에는 육아라는 커다란 숙제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육아의 주체를 남편에게 이양하고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집중할 수 있는가, 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문제다. 아내의 경우, 대학원에 진학하여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육아와 가사에 대한 부담 역시 일정 부분 내려놓아야 한다. 미술이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 키우면서 여유 있게 그림 그려"라는 충고는 예의가 없어 보인다. 고등교육을 통과한 뒤 획득하는 일(profession)은 그 자체로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집어삼키기 마련이다. 그 정도 수준의 존중이 필요하다. 나는 육아와 가사에 최대한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아이들을 재운 뒤 서재로 들어가 일을 한다. 늦은 새벽까지 논문을 쓰거나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직업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 본인의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 경험을 지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겪었으므로, 아내가 내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 과연 내가 더 많은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나 역시 한계치에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전 직장으로부터 단기 계약직 제의가 들어왔고, 아내는 큰 고민 없이 승낙했다. 몇 년이 지나긴 했지만 전에 해본 업무이고, 속된 말로 6개월만 일하면 되는 일이기도 했기에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해 보였다.무엇보다 일을 다시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순수미술과 같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고 근무 당시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업무였지만,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어 했다. 일터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다른 모든 제약요건에 우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첫 출근 전 날인 어제 저녁,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서울에서 살던 당시 매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보던 아내의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오랜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과정이 쉬울리 없었다. 어쩌면 다음 6개월 동안 역류역 식도염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카드값으로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일부 저축한 비용으로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이라도 한 번 갈 수 있다면 행운일 것이다. 그리고 6개월 뒤 아내는 다시 일을 하지 않는 여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단기 계약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아내의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충분한 수입을 벌고 있었다면! 이라는 자책도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어제저녁, 아내가 첫 출근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고 말했다. 스트레스받아가면서 다시 일을 하려 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보여 건넨 말이었다. 부족하나마 안정적인 수입은 내가 확보하고 있으니 부담을 갖지 말라는 지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말에 상당히 불쾌해했다. 자신이 일터로 돌아가는 행위가 가볍게 받아들여졌다고 느낄 법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상당한 고민 끝에 내린 '희생'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으면 관둘 수 있을 정도의 무게로 받아들여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 간 아내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된 오전 수영도 포기해야 했고, 어쩌면 저녁에 가던 발레 수업도 횟수를 줄여야 한다. 세 가족이 출근과 등원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난 평일 오전, 설거지와 빨래, 청소 등에서 잠시 해방되어 즐기던 넷플릭스도 당분간 안녕이다. 아내는 큰 결심을 했고, 나는 충분히 존중해야 했다.
나는 아내가 편히 삶을 즐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고 싶을 경력을 계속 쌓았으면 좋겠다. 이 두 개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 수 있다. 우리 가족이 한 번 끊겨버린 아내의 경력을 지속적인 차원에서 다시 살려내기 전까지 이 딜레마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