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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Aug 22. 2020

1년 6개월간의 서울 생활이 남긴 세 가지.




1. 우선 사투리는 거의 그대로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방에서 단련되어온 내 억양은 표준어 사이 단연 튀었다. 새로운 만남이 있을 때마다 '고향이 어디예요? 여기 분 아니시죠?'라는 말을 듣곤 했고, 돌아가기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다. 상대가 '고치지 마요, 남자들 사투리 쓰는 여자 좋아해요.'라고 덧붙일 때도 많았는데, 귀여워 보이려고 안 고치는 게 아니라 고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선 나름 표준어를 구사한다고 믿고 있으니까...



2. 다양한 인연을 만났다. 인턴 때 제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간 줄 알았는데, 땅 덩어리 넓고 인구가 밀집하다 보니 여기가 더했다. 러닝 모임 사람들에게선 비를 뚫고 달리는 열정을 배웠고, 사교 모임에서 만난 전직 아이돌의 친누나완 꽤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인연보다는 단발성의 만남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성적으로 다가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외로웠던 것 같다.



사실 그들을 알아갈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스며드는 연애를 선호했기에 소개팅도 별로 해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보여주려 하는 모습이나 외적인 부분들만 알고 다가온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앞섰다. (그리 훌륭하지도 않다만) 처음에는 겉모습으로 어필이 될 수 있어도, 속내까지 알아도 지금처럼 날 좋아해 줄까 겁이 났다. 이전 몇 번의 경험이 심어준 학습효과 때문이었다. '미안해. 네가 잘못한 건 없는데, 이젠 널 계속 사귈 만큼 좋아하지 않아.' 열렬히 다가왔던 몇 명이 저리도 맥 빠지는 헤어짐을 고하고 떠났으니까.


짧은 만남에서도 흔적은 남았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을 만들었고, 그때의 기억은 쏟았던 감정의 비중만큼 남았다. 어느 것이라도 고개를 드는 날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음이 텁텁해졌다. 올라올 땐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있었는데, 여긴 아닌가 보다.



3. '서울 사람들'만 알던 문화에 동참해서 그 이질적인 단어에 소속감을 갖게 되어 좋았다. 방송에서 보던 맛집, 랜드마크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연예인을 본 날은 "서울은 집 앞에 연예인이 지나다녀!" 라며 흥분된 목소리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몇 달뒤 경기도로 이사한 덕에 실질적인 서울 라이프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곳에 실제로 발자국을 찍고 낯설던 것들에 점차 익숙해지는 게 좋았다.


청계천은 생각보다 폭이 좁았다. 높은 건물들에 나무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물결 위론 햇살이 튕겨져 나왔다. 그 옆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던 점심에는 바쁜 직장인이 된듯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광화문과 북촌은 고즈넉한 건물이 많았다.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었는데, 휴일에 할 수 있는 제일 좋아하는 일이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치킨을 시켰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그보다 반포 한강공원의 야경이 훨씬 예뻤는데, 같이 갔던 사람과 순간의 이미지가 너무 좋게 남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려갈 때가 다돼서야 홍대에서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몰려있는 곳이, 3번 출구임을 알게 됐다. 홍대입구역엔 출입구가 9개나 돼서 늘 헷갈렸는데, 홀린 듯 봤던 풍경은 홍대도 합정도 아닌 연남동이었다.


혜화 마로니에 공원. 처음 구한 자취방 근처였다. 성균관대 학생들에겐 지겨운 장소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머물렀던 건 내겐 큰 행운이었다. 만날 사람 없는 휴일에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인근 남산공원이나 광화문으로 향하곤 했다. 퇴근 후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는 자주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나는 20년 동안 서울 라이프를 꿈꿔왔고, 대학생이 되면 그 꿈을 이룰 줄 알았다. 그러나 20대 후반이 돼서야 드디어 발을 들이게 됐고,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 다시 고향으로 회귀하게 됐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현재 근무지에서 계약 만료가 다가오는데, 지금은 구직에 대한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나는 한 발을 디디면 다시 디뎌야 할 한걸음이 생기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살아왔다. 흔들릴 때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기댔고, 앞에 놓이는 대로 기계적으로 발을 뻗다 보니 이곳에 이르렀다.


얼마 지속되지 않은 안정감이 다시 불확실성으로 바뀌는 건 두렵다. 당장 백수가 되는 현실이 무섭기도 하다. 가족들이 모두 출근한 집에서 혼자 노는 것도 며칠이 지나면 무료해져 구직사이트를 들락날락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고향집은 산으로 둘러싸여 지금의 환경과는 많이 다를뿐더러, 학창 시절처럼 종일 놀아줄 친구도 없다. 카톡을 해도 답장이 느리거나, 일 얘기만 할게 뻔하다. 그렇지만 당장 나를 포장해서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마음을 쓰고, 이후에도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내 모습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지금은 그럴 의욕이 없다.



더군다나 수화기 속 목소리로 존재하던 엄마의 얼굴을 실제 보는 것만으로도, 집으로의 회귀는 의미가 있다. 대학 입학 후 나는 늘 타지 사람이었고, 여기 올라온 뒤론 특별한 날에나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서울이란 넓고도 험난한 세상을 경험했으니 이제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그들의 품으로 잠시 돌아가고 싶다. 처음 걸음마를 뗄 때 나를 독려해주던  것처럼 잠시 힘이 빠진 내가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문을 열면 들어서는 곳은, 적막이 싫어 TV 소음으로 채운 자취방이 아닌, 가족들의 목소리로 가득한 나의 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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