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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순 Dec 12. 2019

통큰여자

그리움

통 큰 여 자

                                                                   이 영 순

     

 계절의 장손인 봄, 많은 빛깔의 아이들을 낳는다. 개나리꽃, 산수유 꽃, 진달래꽃, 벚꽃이 다복하게 성장한다. 노랗고 붉은 색의 재롱이 흐려질 즈음 보라색 라일락꽃이 선명하게 그림을 그리더니 사춘기에 들어서는지 무뚝뚝해 진다. 커가는 아이들의 조잘대는 목소리가 간절하게 그립다. 계절의 맏이인 봄은 금슬이 좋은가 보다. 사람들이 잊을 만 할 때 쯤 온 세상에 봉긋봉긋, 꽃봉오리가 만삭에 이른다. 볼록한 봉오리는 출산 막달에 다다른 듯이 느지막이 세상에 예쁜 철쭉꽃향기를 뿌려 놓는다. 늦게 낳은 자식이어서인지 봄은 특별히 더 막둥이를 사랑한다. 봄의 막내, 빨간 철쭉꽃의 웃음소리는 하늘까지 들린다. 마음이 들판에서 피어난다.

봄의 끝자락에서 철쭉꽃을 바라보며 따사로운 바람을 만난다. 늦둥이의 눈빛은 바람소리를 어미의 목소리로 착각을 하는지 해맑은 아이의 눈까풀처럼 나풀나풀 흩날린다. 까르륵 웃어주는 아기 같다. 늦둥이의 재롱을 즐기며 봄을 붙잡고 있다. 연두의 잎사귀를 짙게 물들이면서 봄을 키워가며 또 막둥이를 떠나보낸다. 막내의 울음소리는 저승에서도 들린다는데 늦둥이 철쭉꽃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돌아보게 한다. 막내를 꼬옥 붙잡고 싶다. 그렇게 봄은 떠나간다. 아쉽다.

     

울 엄마도 인생이 막바지로 급하게 달리고 있을 때 즈음 손자를 봤다. 세상을 빛내주는 햇살보다도 더 소중하게 밝게 빛나는 인생의 등불 같은 아이였다. 당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였던 거 같다. 그 손자가 아이를 낳았다. 증손자. 엄마는 떠나셨지만 증손자는 첫 생일이 다가온다.

맑고 밝은 날, 돌잔치에 참석하려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아무리 급하게 달려가도 울 엄마는 없을 것이다. 만날 수 없다. 그리움은 간직한 이의 마음속에만 기억될 것이다. 언니의 마음에, 내 아쉬움 속에 무덤덤한 오빠의 가슴 안에서 아련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가 말은 안하지만 우리 삼남매의 마음과 가슴은 “짝짝짝” 소리 없이 몸동작 없는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움인지 미움인지 긴 도로 위에 적셔진다. 자동차 바퀴는 연실 돌아가면서 마음을 뭉개버린다. 만날 수 없음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은 몸보다 먼저 도착해서 아쉬운 막내딸을 반긴다.

     

 손자가 혼인을 서두를 즈음 엄마의 기억은 잦은 외출을 한다. 보따리도 싸지 않은 채 정처없이 떠나간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실인 듯 곧바로 찾아 돌아온다. 어느 날은 동네 밖을 넘어가서는 해가 질 무렵까지도 돌아오질 못한다. 마실은 여행이 되어 여독이 깊게 쌓인 채 힘겹게 돌아온다. 다시 피로도 풀지 못하고 깊고 짧게 긴 여행을 떠난다. 저승을 미리 탐닉했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어설픈 목소리를 흘리면서 무겁게 허덕인다. 돌아오는 길은 무엇을 그리도 많이 짊어지고 왔는지 집안 곳곳에  얼룩진 넋두리를 빨래 널듯이 널어놓는다. 아마도 “기억해 달라고, 알아 달라고” 우리들은 넝마처럼 걸려있는 얼룩진 하소연을 모른 척 했다. 외면했다.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고 다 걷어다가 내다 버렸다. 바라보는 나, 마음까지도 다 던져 버렸다. 기억은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울며 떼를 쓴다. 더 멀리 나가버린다. 젊은 날을 찾아서 지난날의 아쉬움을 넘나든다.

     

저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까를 수없이 묻곤 했다. 그렇게 바라던 손자의 혼인을 아시는지 아니면 당신은 이미 저편의 세계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무덤덤이 침대만을 차지한 채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은 잠시 돌아온 현실에서 똑똑했던 엄마는 모든 것을 포기했으리라. 우리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귀찮아서,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네 탓, 내 탓, 엄마 탓을 끝없이 했다. “다 소용없었네.”라는 말을 기도문 외우듯이 되뇌이며 서러워하면서 죽음의 길로 떠났을 거 같다. 죽음이 다가와도 귀는 마음은 감정은 남아 있지 않을까? 젊을 때 같지는 않겠지만 듣고 느끼지 않을까?

     

“엄마, 얼마나 외로웠어요?”

     

돌 사진을 찍는다. 고모들도 함께 찍으라면서 사진사가 나를 바라본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며 생각하니 나는 고모가 아닌 고모 할머니였다. 아니지. 쳐다본다. 오빠 내외. 조카들 세명. 배우자들 세 명, 손자들 여섯 명. 14명의 가족. 저 모습은 오빠의 직계가족이었다. 오빠를 기준으로 가족의 의미, 가족의 숫자이다. 엄마는 저 속의 무리가 아니다. 만약 저 속에 엄마가 계시다면, 아름답지 않을 거 같다. 오빠의 가족들 속에 엄마는 안 계신 것이 맞는 거 같다. 저런 모습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시기에 사라질 수 있음을. 세상을 떠나는 거.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받아들인다면 서운할 것도 없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에 아쉬움도 없다. 당연한 이치에 따르면 된다. 그 이치를 욕심 없이 인정하리라.

     

‘당신도 인정하시면서 떠나셨겠지….’

     

나도 지금 며느리가 잉태중인 아이가 태어나서 훗날 결혼 할 것이다. 아들의 사진첩에서 나도 사라질 것이다. 확연한 진리 앞에서 방황하지 않으리라.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면서 너무도 당연하듯이 서운해 하지 않으리라. 자연의 순리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리라.

     

이 세상 정도는, 너나 가지라고, 인심 쓰듯이 툭, 던지고 돌아서는 멋진 여자. 

난, 필요 없다고 세상을 통째로 크게 쏘는 여자,  통 큰 여인으로 시원하게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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