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퇴사한 진짜 이유
퇴사에 대한 고민은 길었지만, 사직서를 던지는 순간은 짧았다.
회사에 문제가 있었기에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이직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우선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고, 벗어나고 나서는 바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라고.. 퇴사하고서는 온갖 약속을 잡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본가에도 오래 머무르며 엄마와 다정한 시간도 가졌다. 그동안 못 봤던 영화를 하루에 3편씩 보고, 보고 싶던 드라마를 새벽까지 정주행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점심을 차려 먹고, 밀어두었던 책들도 하나씩 읽어 나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주변에서 퇴사한 이유에 대해 물으면 "대표가 X 같아서."로 일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문득 궁금해졌다. '나 정말 대표가 X 같아서 퇴사했나?'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퇴사한 진짜 이유를.
정말 바쁘고 일도 많은 팀에 입사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불을 끄면서 퇴근했다. 일은 해도 해도 새롭게 생겨났고, 적은 인원들은 업무 강도에 지쳐갔다. 불안정한 회사 탓에 책임자들은 퇴사 및 휴직으로 자리를 비우고, 갑작스레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된 선임은 나와 같은 사원들을 쥐 잡듯 잡았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냐,며 저 멀리 있는 부서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예사였다. 멍청하다, 싸가지 없다, 내가 우습냐, 넌 그래서 안 된다 등등의 말도 가볍게 뱉었다. 몇 번을 요구해도 바쁘다며 결재를 해주지 않았고, 그러다 일이 커지면 내 탓을 했다. 짜증 나면 결재서류를 집어던졌고, 멸시하는 눈빛은 덤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매 화 울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은'에게 과하게 몰입되어 있었다. 나는 학폭을 당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나 마음이 쓰리고 아플까? 나 스스로도 너무 과몰입한다 싶었는데 가해자인 '연진'을 보면서 그 선임이 생각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당한 거, 직장 내 괴롭힘이었구나'
<더 글로리>에서 끔찍하게 동은을 괴롭힌 연진은 본인이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괴롭히냐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선임도 그렇게 말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할 거라고.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
그런데 몰랐다.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지도 몰랐고, 그것 때문에 내가 다치고 아픈지도 몰랐다. 주변에 힘들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나를 걱정하면 '그 사람도 힘드니까 그러겠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일을 잘 못해서 그래. 괜찮아.'라며 그 사람을 이해하고 두둔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는데.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누우면 잠들기가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해야 하고, 그 사람 얼굴을 봐야 하고, 또 혼나게 될 테니까. 차라리 아침에 아파서 못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근하는 찻길에 서서도 생각했다. 저 차에 살짝 치이면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될까. 그럼 오늘은 험한 소리 안 들을 수 있을까.
아주 심각했는데, 내 마음은 이미 허물어지고 망가져서 엉망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스스로에게까지 '괜찮다'라고 했다. 나조차 내가 아픈 것을 알아주지 않았고, 나조차 나를 아끼지 않았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퇴사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깨닫다니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때의 내가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사정에 의해 나는 다른 팀으로 옮겨가게 됐다.
옮긴 팀의 업무는 적성에도 더 맞았고, 다행히 사람들도 참 좋았다. 업무량은 여전히 많아 야근은 있었지만 야근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은 정말 짧았다.
대표의 불합리에 맞선 죄로, 대표는 내가 하는 업무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핑계를 대며 결재를 미뤘다.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업무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직서를 던졌다.
대표한테 화가 나고 짜증 나서였다. 그때는 그게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내 위치를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6시에 퇴근한 날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참았고, 점심시간에 밥도 급하게 먹고 와서 일을 했다. 좀 더 나은 근무 환경을 위해 회사 제도를 위해 이리저리 머리 굴려가며 일했지만, 대표의 기분을 상하게 한 나는 한순간 반동분자가 되어버렸다.
그게 내 위치였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내 커리어는 대표의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것.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결국은 이렇게 내쳐질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나는 내 삶을 정신 나간 대표에게 맡길 수 없었다.
퇴사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나의 진짜 퇴사 이유를 깨달았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마주하고 싶지 않아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 애달프고 안쓰럽다. 나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나 나를 버려두고 외면했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상처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보려 한다. 그 아픈 시간들도 전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찬찬히 마주해 볼 생각이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계획도 생각도 없지만 내 마음에 집중하며 나에 대해 좀 더 알아가보려 한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