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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0. 2023

그리워지는 건 음식보다는 손맛이겠지

  자취를 시작하면서 엄마는 내가 밥을 잘 못 챙겨 먹을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잘 챙겨 먹고살고 있다. 실은 내가 생각해도 꽤 훌륭하게 매 끼를 열심히 차려 먹는다. 주로 하는 요리는 한 그릇 요리다. 말 그대로 한 그릇에 담아내 뚝딱 먹을 수 있는 요리들인데, 면 요리들은 대개 그렇고 밥도 덮밥이나 볶음밥처럼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요리들이다. 그런 요리들은 한 그릇에 소복하게 담아내면 그럴듯해 보이고 설거지도 줄일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간혹 반찬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시금치나물이나 숙주나물 무침, 무생채나 오이고추 된장무침 같은 매우 평범하고 집밥스러운 반찬들.

  하루는 시금치를 참기름 넣고 고소하게 무쳐서 비빔밥도 해 먹고 김밥도 말고 싶었다. 마침 동네 마트에서 시금치 한 단을 천 원에 팔기에 호기롭게 한 단을 사 왔다. 사 온 지 이틀인지 사흘인지 지난 후 시금치를 보니 무르고 있었다. 나는 시금치가 무르는 걸 처음 봤다. 엄마는 분명 며칠 베란다에 두어도 멀쩡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집에는 베란다가 없다. 환기도 잘 안 돼서 온도와 습도가 높다. 한여름이 아니어도 식재료가 생생하기 힘든 환경이다. 우선 단을 풀어 물에 담갔는데 군데군데 물렀지만 전부 버리기엔 아까웠다. 울상인 채로 사진을 찍어 엄마한테 전송했다. ‘시금치가 이렇게 됐는데 먹어도 돼?’ 엄마는 무른 부분만 떼어내고 데치면 괜찮다고 했다. 무른 부분을 떼다 보니 한 단이던 시금치는 거의 반 단으로 줄었는데 그걸 데치니까 양은 한 주먹조차도 안 됐다. 엄마의 넉넉한 시금치 무침이 떠올랐다. 엄마는 대체 몇 단씩이나 무치는 거지? 그렇게 무쳐서 양껏 먹고도 반찬통에 한가득 담아 냉장고에 넣었었는데 내 시금치나물은 보관할 것도 없었다. 대개는 감으로 요리를 하기 때문에 소금을 살짝 치고 참기름과 참깨를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일단 냄새는 고소하니 합격이었는데 맛을 보니 뭔가 부족했다. 간이 부족한가 싶어 소금을 좀 더 넣어봤는데 그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엄마한테 물어봐도 더 들어가는 건 없었는데 묘하게 엄마가 해준 나물과 맛이 달랐다. 나는 한 줌의 소중하고 부족한 시금치 무침으로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비슷한 일들은 계속 반복됐다. 엄마가 알려준 대로 했는데 밍밍하던 숙주나물은 소금을 꽤 넣은 것 같은데도 맛이 안 느껴져서 미각을 잃었나 싶을 정도였다.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보고 만든 무생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해주던 아삭하고 상큼하면서 무의 달큰함도 끝에 느껴지는 무생채는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엄마의 반찬들은 언제나 냉장고에 가득 쟁여져 있었고, 재료만 있다면 언제든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어려운 줄 몰랐다. 시금치 한 줌을 무치기 위해 다듬고 씻고 데치고 간을 맞추는 여러 과정이 존재하는지, 시금치가 잔뜩 들어간 김밥을 몇 줄이나 말고도 남도록 시금치를 무치려면 얼마나 많은 시금치가 필요한지. 내가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먹어왔다는 걸 알았다. 어떤 반찬도 쉬운 게 없었는데.      

 

  

  엄마와 이모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외할머니가 해준 음식 중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나의 외할머니는 음식을 잘하는 분이셨다. 양념을 엄청 아끼고 간도 싱겁게 하는데 어쩐지 어린 내 입맛에도 모든 반찬과 국들이 맛있었다. 엄마는 간혹 할머니가 해주던 음식들, 가령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멀겋게 담근 열무김치 나 숭덩숭덩 썬 배추와 들깨가루를 넣은 배춧국 등에 대해 말하곤 했다. 엄마와 이모는 내 질문을 듣고 순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씩 음식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열무김치나 나박김치, 씻은 김치를 지진 것이나 멸치 조린 것 등등. 하나만 꼽으라고 했는데 음식들은 계속 나왔다. 이모가 ‘김치 씻어가지고 들기름에 지진 거 있잖아’라고 하면 엄마가 ‘멸치 그렇게 조린 것도 맛있었는데’하는 식으로 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나왔다. 그들은 입을 모아 제 엄마의 요리솜씨를 칭찬했다. 별것도 안 넣고 대충 하는 것 같은데도 진짜 맛있었다고. 그리고 이모는 내게 물었다. 너는 엄마 음식 중에 뭐가 제일 생각날 것 같냐고. 골똘히 생각했다. 두툼해서 육즙이 흘러넘치는 돈가스와 엄마 표 특제 소스, 시원하고 칼칼하게 담은 열무김치에 말아먹는 국수, 속이 터지게 꾹꾹 눌러 담아 튀기는 고추 튀김, 정성으로 담아둔 오이지를 힘껏 짜서 무친 오이지무침, 수많은 재료를 다져 넣은 감자샐러드 샌드위치, 여행 다녀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김치 넣은 순두부찌개, 말갛고 칼칼한 경상도식 추어탕, 각종 장아찌와 김치들까지 삼십 년 간 먹어온 엄마의 요리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리워지는 것은 한 가지의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 모든 음식에 들어간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질 것이란 것을.      


  내가 한 반찬들에 부족한 건 엄마의 손맛이었는지 모른다. 비닐장갑을 끼거나 숟가락으로 휘저어도 아무튼 손맛이라는 건 존재하는 것 같다. 엄마 손이 닿으면 부족한 부분이 감쪽같이 채워지고 미소가 떠오르는 맛으로 바뀌었다. 비단 나의 엄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에게는 손맛이 있고, 우리는 그 손맛 아래서 자랐다. 그래서 유독 지치는 날, 마음이 힘들고 고된 날, 아프거나 우울한 날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생각나는 것이다. 어린 나를 채우고 키웠던 손맛이 지금의 나도 다독이고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는 환상적으로 맛있는 음식들이 끝도 없이 많을 테지만 내내 그리워할 단 하나의 맛은 엄마의 음식일 것이다. 훗날 그리워질 엄마의 여러 음식들의 레시피를 전수받는다 해도 엄청난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거기에는 엄마의 손맛이 빠져 있을 테니까. 꼭 그만큼 부족한 맛이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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