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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0. 2023

오리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동네 마트에서 가끔 엄청난 할인행사를 할 때가 있다. 특히 고기류를 싸게 파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훈제오리가 매우 싸다. 엄마와 나는 각자 동네의 할인 전단지를 공유한다. 여기선 이게 싼데, 거기서는 그게 싸네? 한 개 사다 둘까, 나중에 가져갈래? 이거 사줄까? 이런 식의 대화가 자연스럽다. 각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모녀는 알뜰함을 빼다 박았다. 저렴한 가격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고생한다. 훈제오리는 막내 동생이 좋아하는 품목으로, 사두면 반찬이 없을 때 간단히 볶아서 주기 좋다. 엄마의 부탁으로 훈제오리를 3팩 사뒀다. 유통기한이 긴 편이라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유통기한 전에 본가에 다시 갈 시간이 없었다. 엄마는 내게 제안했다. “우리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거 어때? 너도 조금 오고, 나도 조금 가고 만나서 점심 먹고 커피 마시고 헤어지자.” 그래서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이 만남에 ‘오리 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것에 우리만의 언어로 이름 붙이는 일은 우리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었다.


  딱 중간은 아니더라도 엄마한테서 너무 멀지 않아야 했다. 그녀에게는 가족의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만 책임지면 되는 1인가구의 가장이 조금 더 멀리 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이 인덕원역이었다. 4호선 지하철을 타던 시절에는 늘 지나치기만 하고 한 번도 내려 본 적 없으며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솔직히 조금 설렜다. 엄마와 이런 식의 만남은 처음이었으니까. 늘 같은 집에서 출발하거나, 엄마가 동생이나 아빠의 차를 타고 내 집으로 왔다가 함께 엄마 집으로 돌아가거나, 내가 엄마 집으로 가거나했다. 엄마는 엄마의 집에서 나는 내 집에서 각각 출발해 같은 목적지에서 만난 경우는 없었다. 엄마와 내가 다른 집에 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분명해졌다. 3팩의 오리고기는 꽤 무거웠다. 여름이 물러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아이스 팩 하나를 넣어 신문지에 꽁꽁 쌌다. 엄마 또한 한 보따리의 짐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과자, 검정깨, 새로 산 감자, 직접 깐 마늘 등이었다. 내가 부탁한 것들 말고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엄마를 보자 애처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엄마로부터 훈제오리 값을 받았고, 엄마는 어떠한 것의 값도 받지 않았다. 내 살림은 많은 부분을 엄마에게 빚지고 있다.     

 

  우리는 퓨전 중국집에 가서 딤섬과 어향가지와 탄탄면을 먹었다. 가지를 어떻게 튀겼는지, 소스에 생강이 들어갔는지, 채소가 좀 적지 않은지, 식당이 너무 덥지 않은지 등의 이야기를 하며 맛있게 먹었다. 얼굴을 보지 못한 시간 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서로 하나씩 꺼냈다. 마치 탁구를 치는 사람들처럼 대화가 이리저리 끊이지 않고 튕겨졌다. 배도 부르니 조금 걷자 했는데 처음 와보는 동네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근처에 시장이라도 있으면 구경하려 했더니 너무 멀어서 작은 하천을 따라 무작정 걷기로 했다. 동네는 오래된 느낌이었다. 높은 건물 대신 낮은 빌라가 많았고, 그만큼 하늘이 넓게 보였다. 지나다니는 인구들은 대개 노인들이었다. 할아버지 몇몇은 공원 정자에 술판을 벌려 놓기도 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와 닮아 보여 엄마와 한참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나가다 서로를 알아보고, 채소가게 주인이 친숙하게 말을 걸고, 노인들이 어디서나 편안히 쉬고 있는 장면들이 마음에 들었다. 낡은 동네는 뾰족한 마음도 다정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계속 걷다 보니 더워서 땀이 흘렀고, 손에 든 짐들이 정말 짐처럼 느껴져서 카페를 찾았다.

  맛있는 케이크를 판다고 해서 미리 찾아둔 카페는 자리가 없었고, 두 번째로 찾아간 카페는 협소했으나 우리가 앉을만한 자리는 있었다. 아이스커피와 디저트 하나를 시켰다. 나는 며칠 전에 시험 삼아 구워본 쿠키 몇 개를 포장해 와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더운데 뭐 이런 걸 또 만들었냐면서 하나씩 야금야금 다 먹는다. 내가 만든 것을 엄마가 맛있게 먹을 때 짜릿할 만큼 행복해진다. 엄마는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있다고 아낌없이 마음껏 표현한다. 그에 비해 나는 조금 무뚝뚝하다. 오버하는 것을 조심하기 때문에 호들갑 떨며 맛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것들을 먹으며 풍부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새삼스럽게 미안해진다. 앞으로는 엄마의 음식을 먹을 때 좀 더 표현해야지, 느낀 그대로 억누르지 않고 전해야지, 생각한다. 엄마는 이모가 다녀간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빠 흉을 보고,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을 말해준다. 그럼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이모가 사 왔다는 과자를 뜯어먹고, 흉보기에 가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동안 해먹은 음식들의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준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엄마를 안심시키는 방법이다. 웃겨서 찍어놨거나 캡처해 놓은 것들도 보여주면서 조잘거린다. 우리는 친구처럼 한참 수다를 떨다가 각자의 짐을 챙겨 일어선다. 역 앞에 채소와 과일을 싸게 파는 가게를 발견한다. 엄마는 둘러보다 오이맛 고추가 싸다며 두 팩을 사서 내게 하나를 건네준다. 지하철은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개찰구 앞에서 헤어진다. 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는 꽤 묵직한 무게로 내 마음을 채운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나는 그런 동네 분위기가 좋더라.’ 엄마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온다. ‘나도 엄청 재밌었네. 히히. 맘도 그런 동네 좋아해. 다음에 또 만나자~ 내가 또 갈게~~’ 물결이 무려 3개나 파도친다. 엄마는 문자에서도 표현이 풍부하다.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서울과 경기도의 낡은 동네들을 찾아본다. 우리는 앞으로도 종종 그런 원정 같은 데이트를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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