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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0. 2023

당신도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어떤 전화의 벨소리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울릴 때가 있다. 전하려는 소식의 내용이 벨소리에 드러나면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2020년 10월 4일 새벽에 울린 전화가 그랬다. 잠귀가 어두운 나도 엄마의 전화 벨소리를 듣고 단번에 정신이 말짱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울고 있는 엄마의 등을 아빠가 토닥이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동안 장례식에 대한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장례식이 고작이었고 친척이나 지인의 장례식에 가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진 옷 중에 제일 무난하고 어두운 옷을 골라 챙기는 게 다였다. 이십 대 후반이면 적은 나이가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너무나 철이 없었다. 엄마가 얼마나 망연하고 정신없었을지 헤아리지 못했다. 그런 엄마를 대신해 다른 짐이나 동생을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날도 모든 일들은 대개 엄마의 몫이었다. 경상북도 경산시까지 차가 막히지 않으면 5시간 이내로 도착한다. 그날 차가 막혔는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간혹 울었고, 나와 동생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장례식장 지하에 들어서자 눈이 붉어진 삼촌들이 우리를 맞았다. 공기가 유독 무겁고 탁하다고 느낀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고 엄마는 갑자기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이미 도착해서 한 번 크게 울었던 이모는 엄마를 부둥켜안고 다시 울기 시작했고, 나는 사촌동생에게 안겨 같이 울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까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강하고 단단했던 엄마는 눈물을 쉬이 흘리지 않았다. 슬픈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봐도 펑펑 우는 내 옆에서 무덤덤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장례식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울었다. 엄마가 할머니의 죽음에 담담할 거라 생각한 건 나의 철없는 착각이었다.      


  할머니는 오래 아팠고, 수 십 번의 수술과 입원을 반복한 생을 살았다. 엄마가 또래보다 일찍 취업해 번 돈은 할머니 수술비로도 많이 쓰였다. 할아버지 집안에서 상속받은 땅들은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조금씩 팔려나가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다. 집안의 돈을 다 끌어다 써도 할머니는 계속 어딘가 아팠다. 나의 할머니는 온순한 분이셨지만 오랜 병마는 순하고 고운 사람도 시들게 만들었다. 척추 협착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질 무렵부터 할머니는 조금씩 가족의 짐이 되어갔다. 큰삼촌이 도맡아 병간호를 했는데 그에게 불평을 참지 않았던 것 같다. 전복을 사다 죽을 끓여주면 짜다고 타박했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서 아픔을 토로했고, 하면 안 된다는 것들을 계속하려 했다. 큰삼촌은 간혹 술에 취해 엄마에게 전화를 했지만, 삼촌을 달래며 할머니를 같이 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삼촌과 할머니의 갈등은 깊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한 날들이 몇 년 간 지속됐다. 엄마는 ‘죽어야 끝나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할머니가 아픈 것은 엄마 생의 전반에 걸쳐 있었다. 돈도 돈대로 썼고, 속도 상할 만큼 상했을 것이다. 나는 간병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밀한 사정은 모르지만 다들 지칠만했다고 생각한다. 긴 병에도 나의 엄마와 이모, 삼촌들은 충분히 효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삼촌 혼자 할머니를 돌볼 수 없었다. 의논 끝에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19 시대 초입엔 그나마 면회가 가능해서 명절에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씀도 잘하시고 괜찮아 보이셨다. 그게 할머니와의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안일했을까, 할머니의 야윈 손을 좀 더 잡아드릴걸, 더 많이 이야기하고 눈을 맞출걸. 뒤늦은 후회는 늘 남은 자의 몫이었다.      



  엄마는 장례기간 동안 퉁퉁 부은 눈으로 친척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르고, 우리들을 챙겼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머니의 시신을 볼 때, 화장하러 들어갈 때, 묘에 흙을 얹을 때마다 울부짖으며 스러지는 엄마를 붙잡아 다독일 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많이 울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농담이어도 할머니의 죽음을 언급하는 엄마는 강하고 단단해서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나는 나의 엄마가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내내 잊고 살았다. 엄마가 할머니의 영정을 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엄마'를 목 놓아 부르던 순간에 당연한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당신도 누군가의 어리고 여린 딸이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모르는 게 있거나 아프거나 힘들고 지칠 때 가장 먼저 엄마를 찾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내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지치고 미워도 제 엄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엄마에게 자식은 언제까지나 자식이었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엄마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엄마가 부디 건강하게 오래 내 곁에 있어주길 이기적이고 간절하게 빌며 엄마 손을 꽉 잡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이모와 통화하다가 울고, 아침에 산을 돌다가 울고, 드라마를 보다가 울었다. 그럴 때 엄마는 나이와 상관없이 그냥 엄마를 잃은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엄마가 이제 나는 부모가 없다며 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를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나와 동생은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일을 하는 동생이 올라오는 주말에 맞춰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가까운 바닷가, 예쁜 카페를 찾아갔다. 그런 시간이 엄마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주지 못함을 알지만 철없는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을 많이 만들면 슬픔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해도 조금씩 덮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프게 깨달은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엄마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다는 사실. 엄마가 내 엄마가 된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수 백, 수 천, 수 억만 분의 일 확률로 엄마와 나는 만났다. 강압적이던 엄마가 미웠던 적도 있고, 순응하기만 하는 엄마가 답답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우울해하는지 알지 못해 속이 상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확률로 맺어진 엄마와 딸의 연이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답답해하고 미워하며 그럼에도 열렬히 사랑하며 살아왔다. 엄마가 나의 엄마라서 너무나 다행이고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쑥스러워 전한 적 없지만 엄마의 딸로 자라온 것이 내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이다.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은 미워하며 살아가겠지만 내가 엄마의 딸이라서 엄마가 내 엄마라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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