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라는 순간들
아이는 훌륭한 스승이다.
단, 아이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보통 아이는 기르고 교육해야 하는 대상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며 잘 살게 하기 위해, 먼저 살아본 부모가 자신이 살았던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교육의 기회를 아이에게 주고자 노력한다.
남들보다 먼저 하고 빨리 하면 경쟁에서 조금 더 수월할 것 같아 그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내가 이랬으면 잘 됐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아이에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강박같은 것도 있었다. 항상 내가 ‘줘야’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의 교육관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앞을 향해 열심히 좇아갈 때, 어떤 때는 아이는 나보다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길을 가다 내가 지쳤을 때는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주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였다.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자는 마음을 먹고 나니,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교육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없이 좋다고 시켰던 것들에 대해, ‘정말 아이가 좋아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과도한 개입이 아이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율성만을 강조했다가는 그 나이에 맞는 교육의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고민의 시간들은 나를 더욱 찾아보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육아를 잘 하려다 보니, 점점 더 나의 삶이 나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물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많았다. 한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잘못된 습관이나 트라우마를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밤잠을 설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훌훌 털고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라 생각하고, 나 자신이 먼저 긍정적으로 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는 존재만으로 나를 끊임없이 다독이고 다시 태어나게 했다.
아이는 직접적으로 나를 가르치기도 한다.
짧은 7년의 시간동안, 아이는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 누군가의 잘못을 쉽게 용서해 주는 법,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법 등
어른이 되면서 점점 하기 어려워진 것들을 다시 쉽게 하는 법.
아이는 앞으로도 나에게 자신의 언어로, 행동으로 나를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서로를 마주하며 함께 자란다.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 좋은 아이란 무엇일까?
에릭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는 저자가 좋아하는 문장으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질문을 경험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이컵 니들먼의 <철학의 마음>
좋은 부모에 대한 답도, 좋은 아이에 대한 답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답 또한 오늘의 답과 내일의 답이 다를 수 있다.
나 또한 해답을 빨리 찾아서 해답대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많은 책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나와 아이에게만 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경험해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