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밖에서 다시 만난 예수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신앙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여정은 이제 가장 높은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지난 15화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품는 교회의 회복을 보았고, 16화에서는 금관의 욕망에 밀려났던 잃어버린 세대를 다시 부르는 교회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내부의 관계를 회복하며 비로소 다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복이 진정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벽을 넘어라.”
교회 안에서 상처를 싸매고, 내부에서 작은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영원히 성벽 안에만 머문다면, 그 회복은 또 하나의 안전한 금관을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안이 아니라, 성벽 밖에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해야 합니다. ‘와서 보라’고 외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들을 향해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이 물음이 바로 17화의 주제입니다. 성벽을 넘는 복음, 거리의 먼지 속에서 다시 만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 우리의 신앙은 성전 안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가.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성벽을 견고히 쌓았습니다. 그 성벽 안에는 아름다운 건물, 화려한 프로그램, 그리고 서로를 순환하는 내부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모았지만, 정작 세상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단단한 성벽을 필요로 했을까요? 그것은 곧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고, '금관의 권세'를 유지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우리의 전제는 늘 이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시오. 그러면 당신을 돕겠습니다." 이 전제는 세상의 약자들을 '선교 대상' 혹은 '사역의 실적'으로 대상화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듣기보다, 그들의 삶을 ‘판단’하거나, 성벽 안으로 불러들여 ‘해결’해주려 했습니다. 성벽 밖, 고통받는 이웃의 자리로 찾아가는 것에는 주저했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성벽 안의 안전하고 편안한 묵상으로 변질되었고, 성벽 밖의 위험과 비난을 회피하는 나약함으로 굳어졌습니다. 교회는 이웃을 부르기만 했을 뿐, 이웃의 자리로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을 때, 그 빛은 성벽 안의 높은 샹들리에를 말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처음부터 성전 중심이 아니라, 거리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성전의 안락함을 거부하시고, 늘 길 위에 머무셨습니다. 그분은 종교 지도자들의 엄숙한 의례보다 세리, 죄인, 이방인, 병자들이 있는 낮은 곳을 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가르치신 시간보다, 성벽 밖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신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벽을 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첫째, 성육신(Incarnation): 교회가 찾아가는 신앙.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듯이, 교회는 스스로의 안전과 금관의 체면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찾아가는 신앙은 겸손의 가장 강력한 증명입니다.
둘째, 동행(Compassion): 해석이 아닌 함께함.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 울고, 만져주고, 곁에 머무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그 고통에 동참하는 심장(Compassion)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현존(Presence): 설교가 아닌 존재로 말하는 복음.
복음은 긴 설교가 아니라, 이웃의 삶에 깊숙이 현존하는 교회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이 이웃의 삶에 닿는 순간, 그 자체가 복음의 문장이 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교회는 결국 거리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안전을 위한 성(城)이 아니라, 세상과 이웃을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벽은 교회의 안전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는 치명적인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은 세상의 거리 속으로 흩어져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교회의 첫 현장은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의 붐비는 거리였고, 최초의 사역은 안전한 담장 밖, 고통받는 이웃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비로소 교회는 부활의 본질을 회복합니다. 부활은 정지된 기적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역동적인 명령입니다. 금관의 안락함이 아니라, 가시관의 고난과 섬김을 통해 교회의 부활은 세상 속에서 완성됩니다. 성벽을 넘는 발걸음이 없는 교회는 죽어 있는 교회와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다시 숨 쉬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기지’가 됩니다. 신앙은 성벽 안에서의 ‘정체성’ 과시가 아니라, 거리에서의 ‘실천’이 됩니다. 교회는 닫힌 ‘종교’가 아니라,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금관을 벗고 가시관을 쓴 교회의 부활은 가장 낮은 자리, 세상의 먼지와 눈물이 있는 거리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성벽 밖으로 나가는 발자국마다, 복음의 가장 아름답고 살아있는 문장이 쓰일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그곳에 예수의 현존도 멈춥니다. 이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아갑시다.
우리를 묶고 있는 탐욕의 성벽을 허무시고, 주님,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회피했던 세상의 고통 속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돌이켜 주옵소서.
교회의 문 대신, 마을의 문을 여는 용기를 주옵소서.
말 대신 삽을 들고, 찬양 대신 짐을 나르는
가시관의 섬김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여, 위험을 피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빛이 되는
부활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거리마다
다시 만난 예수의 흔적을 남기게 하옵소서.
다음 회 예고
“금관을 벗긴 자리, 교회는 어떻게 다시 서는가”
교회는 사람을 잃고(15화),
세대를 잃고(16화),
세상을 잃었습니다(17화).
그러나 이 모든 상처의 뿌리는
교회의 *‘마음’*이 아니라,
교회의 *‘구조’*에 있습니다.
목회자 중심 권력, 교단 정치, 세습과 재정,
복음보다 자리를 지키는 질서들이
금관의 신앙을 다시 만들어왔습니다.
18화에서는 드디어 이 질문을 마주합니다.
“교회의 구조가 회개하지 않으면,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음 회,
교회가 권력의 구조를 내려놓고
성령 아래 다시 서는 길을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