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예수 " 연재를 마칩니다
우리는 19회에 걸친 이 기나긴 고찰 속에서, 한국 교회를 짓눌러 온 '금관(金冠)'의 무게를 묵묵히 마주해 왔습니다. 그 금관은 승리와 권위, 그리고 기념비적인 성공의 화려한 이름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외형의 찬란함과는 달리, 그 무게는 교회의 심장을 뛰게 하는 역동적인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금관은 교회를 세상과 단절된 성곽 안에 가두었고, 견고한 재정과 이념적 단일함이라는 방패 아래 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는 '멈춰버린 그들만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멈춰버린 공동체는 운동성을 잃고 필연적으로 부패의 길을 걷습니다. 금관이 가져온 정지성은 공동체의 핵심 동력을 마비시켰고,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는 조용히 침묵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과 헌신의 짐, 즉 십자가의 무게를 거부했기에,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극우 이념이라는 견고하고 달콤한 착각 속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이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금관이 만들어낸 모든 고립과 안주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한 공동체의 길을 향해 떨리는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금관을 벗어던지는 일은 단순한 장식의 교체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뒤흔드는 구조적인 회개이며,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근본적인 단절의 선언입니다. 이 뼈아픈 해체 과정은 교회가 짊어졌던 가장 무겁고 위험한 이념적 짐 두 가지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첫째, 금관은 교회를 세속 권력의 그림자 아래 묶어두었고, 특정 정치적 이념과 결탁시켜 하나님의 언어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언어가 아닌, 세속적인 성공 논리나 국가주의적 구호에 의해 신앙을 규정하던 모든 순간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금 '하나님의 언어'를 배우는 겸손한 학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정 정당이나 덧없이 스러질 이념이 아닌, 오직 복음의 본질에만 헌신하는 탈정치화된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자리는 권력의 높은 정점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과 눈물이 교차하는 가장 낮고 겸손한 교차로여야 합니다.
둘째, 금관은 우리에게 성공과 번영만이 전부인 것처럼 속삭이는 거짓된 신학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자기 부인(Self-denial)이라는 고귀한 역설에서 꽃 피어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다시 살아내는 복음'이란, 바로 우리의 왕이 스스로 쓰셨던 가시관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스스로를 비워 가장 낮고 취약한 존재와 기꺼이 연대하는 빛의 길을 걷는 윤리적 실천을 통해 금관의 탐욕적 그림자를 영원히 거부해야 합니다. 이 역설적이고 아픈 실천이야말로 공동체의 진정한 정체성이며, 세상이 우리 교회를 통해 보아야 할 유일하고 변치 않는 진실입니다.
금관이 해체된 자리에 마침내 새로운 왕관이 놓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왕이 이미 쓰셨던 가시관(荊冠)이며, 세상의 모든 왕관 중 가장 가볍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의 짐을 지는 숭고한 상징입니다. 교회가 다시 이 가시관을 쓴다는 것은, 멈춰버린 그들만의 교회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뜨겁게 움직이는 동사로의 영원한 출발을 의미합니다.
가시관을 쓴 공동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경건한 성곽을 지키는 데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상처 입은 자들, 소외된 이들, 그리고 구조적 폭력 아래 신음하는 이들을 향해 머뭅니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아픔을 공유하며,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는 회복의 몸짓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한 신앙생활을 넘어선 이 급진적인 환대의 실천을 통해, 공동체는 이제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금관은 현재 세대의 안락과 기득권을 보장하려 했기에 다음 세대에게는 분열과 부채만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시관 공동체는 눈앞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고통스러운 미래를 위한 투자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이념의 확성기로 이용하는 것을 멈추고, 그들을 희망과 사명의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우는 데 우리의 모든 자원을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공동체의 영속성을 위한 가장 본질적이고 고귀한 헌신입니다.
가시관은 공동체에게 끊임없이 세상과 움직이고 관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 공동체의 예배는 정해진 시간에 건물 안에서 드리는 의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세상 속에서 이웃과 맺는 지속적인 관계성이 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입니다. 교회가 건물 안에 갇힌 멈춰버린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끊임없이 흐르고 나누어지는 '세상을 향한 몸'이 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예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금관을 벗어던지는 이 뼈아픈 회개는 완성된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새로운 출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긴 여정을 통해, 금관이 상징하던 고립과 정지, 즉 *멈춰버린 그들만의 교회'가 결국 교회의 극우화와 이념화였음을, 그리고 가시관이 상징하는 공동체의 삶이 바로 세상을 향한 공동체의 역동적인 사명임을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무거운 금관을 쓴 기념비적인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시대는 가장 가벼우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가시관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길을 묵묵히 따르는 진정한 공동체를 간절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 연재의 종결과 함께 책 속에서 끝을 맺습니다. 금관의 그림자 아래 정체되었던 모든 과거와 단절하고, 이제 우리는 다시 가시관을 쓰고 세상 속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딛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계신 그 삶의 현장에서, 가시관을 쓴 새로운 공동체의 역사는 이제 여러분의 몫이 되어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19회에 걸친 이 뼈아픈 고찰의 여정을 끝마치는 지금, 저는 깊은 회한과 감사의 감정 속에서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저는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한국 교회의 일원으로서 숨 막히는 현실을 개탄하는 죄인의 심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금관'의 무게, 즉 외형적 성공과 권위에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슬픈 자화상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금관은 찬란했지만, 결국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십자가의 헌신 대신 안락한 이념의 성곽 안에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한때는 세상의 빛이었던 교회가 어쩌다 '멈춰버린 그들만의 교회'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절절한 탄식이자, "다시 돌이키라"는 처절한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단 하나의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오히려 저는 저 자신의 신앙과 이웃을 향한 무관심, 그리고 교회의 안일에 깊숙이 물들어 있던 제 자신의 부족함부터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제가 붓을 든 것은, 어쩌면 저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아프고 솔직한 회개의 메시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길은 홀로 걷는 길이 아님을 독자 여러분을 통해 깨닫습니다. 무겁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지막 글자까지 함께 걸어주신 여러분의 따뜻하고 굳건한 눈빛이 바로 이 고백의 여정에서 제가 얻은 가장 큰 위로이자 희망입니다. 금관을 벗어던지고 가시관을 다시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이나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며,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워가야 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연재의 과정에서 처음의 계획과 달리 순서와 목차는 계속하여 변경되고
전체 저술의 의도도 흔들리는 경우들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저의 부족과 함께
감사를 전합니다.
이제 저술의 짐은 끝났지만, 우리의 사명은 이제야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부탁드립니다. 이 책이 남긴 작은 질문들을 외면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가시관의 공동체를 세우는 뼈아픈 노력과 간절한 기도를 이어가 주십시오. 고통스러운 곳으로 기꺼이 나아가 이웃의 상처를 끌어안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왕이 걸으셨던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긴 여정을 끝까지 동행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 가시관의 열매로 풍성하게 맺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여러분의 손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