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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를 다시 부르다

청년이 떠난 교회, 다시 듣는 작은 목소리

by 여운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16화. 잃어버린 세대를 다시 부르다 "청년이 떠난 교회, 다시 듣는 작은 목소리"

“빈자리는 건물이 아니라 세대였다”


13화에서 언어의 회심이 삶의 걸음으로 바뀌었고, 14화에서 그 걸음들이 모여 빛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를 재탄생시켰습니다. 15화에서는 그 재탄생의 증거를 끊어진 관계의 재결합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회복의 서사는 현실 앞에서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누가 다시 그 공동체로 돌아오는가?"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웅장한 건물을 지키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성전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고, 예배당은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통계가 가리키는 비극적인 현실은, 그 견고한 건물 안에서 가장 중요한 세대, 즉 10대에서 30대의 젊은 영혼들이 급격하게 떠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지켰지만, 미래를 짊어질 세대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관의 권세를 붙잡고 체면을 세우는 동안, 왜 그들은 침묵하며 교회를 떠났는가? 그리고 이제 상처 입은 교회는 어떻게 다시 먼저 그들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회개의 여정은 떠난 자리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의 의미를 뼈아프게 해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청년의 이탈’은 단순 부재가 아니라 심판이었다


한국교회가 마주한 2030 세대의 급격한 탈교회 현상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나 개인적인 신앙 상실이 아닙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심판이었습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냉정한 수치(자료: 한국갤럽, 기윤실)는 청년들이 교회를 외면한 이유가 세상의 유혹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의 문제 때문임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청년들은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대신 혐오와 정치적 선동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세습과 비윤리적 재정 사용 앞에 무력하게 침묵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수평적인 사랑의 공동체 대신, 나이와 직분을 앞세운 경직된 위계와 권력 구조를 강요했습니다. 이 모든 불의 앞에서, 젊은 영혼들은 자신의 신앙적 의심이나 고통을 말할 공간이 부재하다는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예배는 연대와 공감이 결여된, 일방적인 종교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명제는 단호합니다. 청년은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교회가 믿을 만한 공동체임을 잃은 것입니다. 금관을 붙든 교회는 이들을 노동력이나 전도 실적으로 소비했을 뿐, 인격적인 동행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Ⅲ. 청년의 목소리 — 직접적 인용 중심(‘설교가 아닌 증언’)


교회가 먼저 듣는 자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청년들의 고백을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교회가 놓친 복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한 청년은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울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들고 강단에 나섰지만, 교회는 저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정했을 뿐, 저와 함께 울어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청년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제가 포기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예수를 믿지만,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난 것입니다. 제 믿음은 교회의 건물과 위계 속에서 숨 막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교회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눈물 흘리는 듣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가르치려 들었던 모든 설교의 말을 멈추고, 먼저 상처 입은 이들의 눈물과 침묵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는 젊은이들 곁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기득권과 거리가 먼 젊은이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청년들의 순수하고 급진적인 용기, 헌신, 그리고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 정신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생명력 역시 세상의 지혜와 권력이 아닌, 젊은 세대의 열정과 사랑 속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젊은 세대를 노동력, 행사 동원, 전도 실적을 채우기 위한 소비 대상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청년들은 교회의 유지와 성장을 위한 소모품이 되었을 뿐, 교회의 본질적 의사 결정 구조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성육신의 신학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걸어가 가르치기 전에,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앉아 고통을 경청하셨습니다. 금관을 붙잡으려는 교회의 습성은 청년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훈계하지만, 가시관의 신앙은 청년들의 곁에 함께 앉아 그들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청년이 돌아오기 시작한 교회들


청년의 이탈은 절망이 아니라, 교회가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청년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한 교회들의 회복 장면들은, 거대한 프로그램이 아닌 태도의 전환이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교회는 예배의 한 부분을 "침묵과 고백의 시간"으로 구성합니다. 이 시간 동안 청년들은 자신의 신앙적 의심, 삶의 고통, 교회에 대한 질문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목회자는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듣습니다. 설교의 방향은 가르침이 아니라 경청으로 이동합니다.


또 다른 교회는 기존의 교회 건물을 카페처럼 개방하고, ‘회복 카페’를 운영하며 치유 상담팀과 전문 심리 상담사를 상주시키기도 합니다. 이곳은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를 말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안전한 공간이 됩니다.


더 나아가, 청년들이 주도하는 사회적 연대의 ‘거리의 교회’가 생겨납니다. 이들은 노숙인, 이주노동자와 연대하고, 환경 캠페인에 참여합니다. 이들에게 믿음은 예배 참석이라는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걷는 존재 방식입니다. 청년들은 결국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이 장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시작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청년 없는 교회는 내일이 없는 교회’


청년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는 교회입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다음 세대로 흘러가야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청년 이탈은 교회에 대한 신랄한 심판이었지만, 동시에 금관을 버리고 가시관의 길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거대한 프로그램과 화려한 건물을 짓는 대신, 이들에게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말하지 않는 용기와 가르치지 않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먼저 사랑받으려 하지 않고, 먼저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때, 청년들은 교회를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회개는 슬픔의 선언이 아니라, 듣는 태도로 완성됩니다.





청년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금관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안, 그들은 가시관의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빈자리를 마주하고 회개합니다
우리는 먼저 듣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의심, 눈물과 침묵을 경청하겠습니다.
듣는 교회, 환대의 교회, 다시 함께 걷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다음 회 예고

17화 「세상을 향한 교회, 성벽을 넘는 복음」


교회는 오랫동안 사람을 부르기만 했습니다.
“와서 예배하라”, “와서 들어라”, “와서 배우라.”
그러나 세상은 더 이상 교회 안으로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먼저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17화에서는 교회가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들을 만납니다.
성벽을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성벽을 넘는 복음.
신자를 모으는 교회가 아니라, 이웃을 찾아가는 교회.
강단이 아니라 거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빛은 높은 탑에서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어둠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는 한 사람의 걸음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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