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관계로 증명하다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금관을 씌우고 권세를 탐하던 오랜 침묵이 깨지자, 우리는 비로소 말을 멈추고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신앙이 선언에서 삶의 걸음으로 전환되면서(13화), 그 걸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는 다시 세상 속에서 숨을 쉬는 부활의 몸이 되었습니다(14화). 교회는 마침내 건물 밖으로 나와,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존재 방식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활은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빛이 건물과 거리를 비추기 시작했다면, 이제 그 빛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야 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거창한 개혁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 회복에서 증명됩니다. 교회가 금관이라는 체면을 벗고, 스스로를 낮춰 상처를 만지는 가시관의 섬김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상실된 공동체는 재건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언어의 완성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의 재결합입니다.
팬데믹의 격랑이 지나간 후, 교회 안에는 수많은 '회복'과 '갱신'의 담론이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온라인 예배의 한계와 비대면 시대의 위기를 분석하며, 구호는 요란하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안의 관계는 멈춰 서 있습니다.
건물을 떠난 청년과 2030 세대의 공백(자료: 갤럽 2021), 봉사의 짐에 지쳐 침묵 속으로 사라진 헌신자들, 깊어진 정치적 이념과 혐오로 갈라져버린 교인들. 우리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사과하고, 오래도록 경청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사령관처럼 ‘성장’과 ‘회복’을 말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정작 상처 입은 아군을 수습하고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는 일에는 무능했습니다.
교회의 약함은 세상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신뢰를 잃은 우리의 침묵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외톨이가 된 이웃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곁을 떠난 이들을 먼저 바라보았어야 했습니다.
신앙의 진실함은 우리의 정통적인 믿음(Orthodoxy)이 아니라, 올바른 실천(Orthopraxis)을 통해 검증됩니다. 야고보서의 선언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 복음은 입으로 선언하는 진리가 아니라 관계의 재결합으로 검증되는 생명입니다(약 2:17).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최종적으로 물으셨던 것은 "네 신학적 이해가 깊으냐?"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뒤에 이어진 명령은 오직 하나, “내 양을 먹이라”였습니다(요 21장). 사랑의 신학은 논쟁을 요구하지 않고, 구체적인 만남과 돌봄을 명령합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시선(눅 15장)은, 다수의 안위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가장 약한 한 사람에게 복음의 무게를 둡니다.
금관의 예수는 높은 곳에서 관계를 지시하고 판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가시관의 예수는 친히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요 13장), 그 거룩한 손으로 상처를 만지고 곁에 머물며 동행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회개는 이 가시관의 만짐을 회복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첫 번째 드러남: 골목의 성찬
어둠이 짙게 깔린 재개발 구역의 어느 골목, 교회 건물의 웅장한 조명은 닿지 않는 낮은 자리입니다. 그곳 쪽방촌의 좁은 방에서, 예배를 대신한 저녁 식탁이 차려집니다. 화려한 성찬대가 아닌, 낡은 합판 위에 놓인 따뜻한 국 한 그릇과 밥입니다. 이곳에는 신학적 논쟁 대신 숨 막히는 삶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식사를 나르는 익명의 자매의 손이 잠시 멈출 때, 밥을 함께 나누는 눈빛 속에서 서로의 고통이 읽힙니다. 이 순간, 성만찬의 언어는 빵과 포도주라는 상징을 넘어 나눔의 따뜻함으로 환원됩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제단은 건물 안에만 있지 않았으며, 진정한 성찬은 나눔이 있는 모든 낮은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드러남: 익명의 손
새벽이 오기 전, 이름 없는 도시락 팀이 움직입니다. 그들은 병원과 공사 현장의 일터로, 혹은 홀로 사는 이웃의 집 문고리로 따뜻한 식사를 걸어둡니다. 이 섬김의 현장에는 홍보를 위한 사진이나 증명 인증숏이 없습니다. 섬김을 받는 이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익명을 선택하고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Image of: 새벽 골목길에 익명의 손이 식사를 전달하는 그림] 이것이 바로 가시관의 권능입니다. 가시관의 예수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사라짐으로써, 섬김을 받는 이의 얼굴에 희망의 빛을 비춥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금관의 욕망에 대한, 소리 없는 가시관의 역설입니다.
세 번째 드러남: 함께 앉는 존재
혐오와 이념 갈등이 교회의 관계를 무너뜨린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함께 앉음’의 신학을 배웁니다. 교회는 자살 유가족 모임, 이주 가정의 상실감, 혹은 극심한 장애를 겪는 당사자들의 고통 현장에서, 설교를 하거나 해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옆에 앉아 침묵합니다. 그날, 언어와 이념의 경계를 넘어선 침묵이 비로소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침묵은 곧 경청이며, 경청은 곧 사랑의 증명입니다. 이 고통의 자리에서 교회는 말보다 존재가 더 강력한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는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잇는 아주 작은 다섯 마디의 동사(動詞)에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무너진 관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먼저 사과합니다. 사과의 용기 후에는, 어떤 변명이나 판단도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습니다. 그리고 신뢰를 쌓기 위해 그들이 맡긴 고통의 비밀을 지켜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끊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평화로이 만납니다. 찾아감, 사과, 경청, 비밀, 재회. 이 다섯 동사는 신학 용어가 아니라, 상처 입은 교회가 다시 사람을 품고 살아가야 할 살아 있는 문장들입니다. 이 미세한 동사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갱신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대규모 집회나 화려한 예산, 거대한 건물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금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살리는 힘은, 떠난 이와의 작은 재결합, 갈라진 세대 간의 미세한 화해,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과의 고요한 동행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에 있습니다.
거대한 성전의 조명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비추는 작은 촛불이 희망의 빛입니다. 이 촛불 하나하나가 모일 때, 교회의 빛은 거짓 없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사람에게로 보내소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먼저 사과하게 하소서.
판단 대신 오래 경청하게 하시고, 침묵 속에서 동행하게 하소서
마침내 다시 만나 손을 잡게 하소서.
우리의 걸음이 재회의 기적이 되게 하소서.
떠난 이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가—우리는 그 문 앞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16화 예고
다음 회 예고
빛은 건물을 비추는 조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닿는 따뜻한 손끝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너무 오래 건물 안에 머물렀고, 사람보다 제도를 먼저 사랑했습니다.
부활의 공동체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15화에서는, 상처 입은 이웃, 교회를 떠난 사람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미처 울지 못한 사람들을 품어내는 치유의 교회들을 만납니다.
복음은 자란 이들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부서진 자를 위한 언어였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잃은 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음 회, 이탈의 시대에 사람을 다시 품는 교회의 회개와 회복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