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의 재탄생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13화에서 우리는 신앙이 말이 아닌 걸음이며, 복음이 완성된 명사가 아닌 진행형 동사임을 배웠습니다. 이는 개인이 홀로 짊어져야 할 삶의 회심이었습니다. 이제 그 회심의 걸음이 멈추지 않고 모여, 다시 하나의 몸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부활은 개인의 영생을 넘어, 공동체의 회복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습니다. 화려한 금관에 갇힌 채 세상의 권위를 탐하던 오랜 역사를 뒤로하고, 예배당이 닫혀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가? 예수의 부활은 무덤을 벗어난 기적이었지만, 진정한 부활 신앙은 그 기적이 에클레시아라는 공동체의 몸으로 세상에 다시 현현(顯現)될 때 시작됩니다.
빛은 새벽의 언어이며, 어둠을 통과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부활의 빛을 품은 교회는 금관의 권세로 높여진 자리가 아닌, 세상의 가장 깊은 상처 속으로 성육신(成肉身)하여 들어가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예배당 건물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함께 살고, 함께 울고, 함께 걷는 빛의 공동체는 붕괴되고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제도화하며 '빛' 대신 '조명'을 택했습니다. 교회의 탑과 십자가를 밝히는 조명은 화려했지만, 그 빛은 종종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보다 우리 건물의 웅장함을 과시하는 데 그쳤습니다.
우리는 빛을 비춘다 말했지만, 그 빛은 종종 우리 자신만을 향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주의와 소비주의의 구조 속에서 세대 간 단절을 겪고 있으며, 신앙생활은 교회 건물 안에서 소비하는 서비스로 전락했습니다. 빛은 제단의 장식품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들을 비추는 낮은 촛불이어야 합니다. 성육신이 부재한 신앙은, 결국 건물의 안위를 지키는 금관의 수호자 역할만 남게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 즉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나온 공동체'에 있습니다. 부름 받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다시 건물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빛의 신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장은 "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선언합니다. 빛은 어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견디며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활은 곧 세상 속의 성육신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세상의 빛이 되셨듯이, 교회도 가장 고통받는 이웃과 연대하며 빛을 증명해야 합니다. 빛은 제단 위가 아니라 거리에서, 고통받는 이의 눈물 속에서 증명됩니다.
삶의 회심(13화)을 넘어, 공동체가 빛으로 살아내는 세 가지 드러남을 제시합니다. 이는 금관의 영광을 포기하고, 낮은 곳을 향한 가시관의 길을 걷는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입니다.
첫 번째 드러남: 경계를 허무는 공공성 (The Public Light) 빛은 교회 건물의 유휴 공간을 사유하지 않고 공유할 때 세상 속으로 나아갑니다. 포항제일교회가 교회의 유휴 공간을 공공 도서관이나 문화 센터로 개방하고, 저자가 섬기는 대구평강교회 등 다수의 공동체가 지역 연합을 통해 '시간 은행'과 '공유 식탁'을 운영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신앙의 자원을 소유가 아닌 공유로 전환함으로써, 교회는 지역사회의 성벽(聖壁)이 아닌 **심장(心臟)**이 됩니다. 교회의 빛이 사유(私有)가 아닌 공공(公共)이 되는 방식이야말로 금관을 벗어던진 교회의 새로운 공공성입니다.
두 번째 드러남: 함께 앉는 존재의 증명 (The Light of Empathy) 빛은 화려한 설교나 해결책이 아니라, 함께 앉아주는 존재로서 증명됩니다. 재난과 트라우마로 상실을 겪은 이들을 위한 '위로의 밤'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 울어주는 침묵의 성찬이 됩니다. 빛은 설교가 아니라, **'네 고통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며 상처 입은 손을 잡아주는 성육신적 존재의 증명입니다. 이 침묵의 연대는, 교리가 아닌 사랑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복음을 증언합니다.
세 번째 드러남: 시간을 잇는 징검다리 (The Light of Legacy) 세대 간 단절의 어둠 속에서 빛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튼튼한 다리가 됩니다. 어떤 교회들은 청년들과 노년 세대가 함께 삶을 나누는 '세대 공유' 공동생활을 실천합니다. 이는 단순한 봉사를 넘어, 노년의 지혜와 청년의 역동성을 교류하며 서로에게 복음의 빛이 되는 공동생활 성경공부입니다. 빛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의 유산을 전달하는 영속성의 신학이며, 절망하는 세대에게 희망의 다리를 놓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빛을 비추는 곳이 아니라, 빛이 되어 사는 곳입니다. '빛'은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 속에 현존(現存) 하시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금관의 신앙은 권세와 영광을 추구했으나, 결국 세상의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시관을 쓴 신앙은 고난을 통해 빛을 회복했습니다. 이 빛은 약한 자들을 돌보는 사랑의 행위로 환원될 때, 교회는 세상의 권위가 아닌 섬김의 영광을 회복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 말씀은 빛을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합니다. 빛의 길을 걷는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세상의 어둠 속에서 다시 체험하는 살아 있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웅장한 건축물이라는 명사(名詞)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돌봄을 살아내는 동사(動詞)여야 합니다. 금관을 벗고 가시관을 짊어진 길, 그 길을 묵묵히 걸을 때에야 비로소 빛의 길을 걷게 됩니다.
빛은 설교나 선언이 아니라, 걸어가는 중에 비로소 증명됩니다. 에클레시아의 부활은 새로운 세대, 상처 입은 이웃,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낳습니다. 교회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을 세상에 다시 현현시키는 사건이며, 희망의 재발견(4부 주제)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어둠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빛이 되게 하소서.
찬란한 금빛이 아니라, 상처를 비추는 낮은 빛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몸이 되게 하시고,
세상 속의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걸음이 빛의 길이 되게 하소서.
주여, 빛 가운데 걷게 하소서.
다음 회 예고
빛은 건물을 비추는 조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닿는 따뜻한 손끝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너무 오래 건물 안에 머물렀고, 사람보다 제도를 먼저 사랑했습니다.
부활의 공동체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15화에서는, 상처 입은 이웃, 교회를 떠난 사람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미처 울지 못한 사람들을 품어내는 치유의 교회들을 만납니다.
복음은 자란 이들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부서진 자를 위한 언어였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잃은 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음 회, 이탈의 시대에 사람을 다시 품는 교회의 회개와 회복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