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서 사랑으로, 분열에서 화해로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Ⅰ. 프롤로그 ― “말이 어두워질 때”
권력의 유혹(1~2화)과 번영의 물결(3~4화)을 따라 금관의 길을 걸어온 한국교회가, 마침내 11화에서 이념의 제단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건물이 아니었고,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타락하고 변질된 것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말’이었습니다. 예배의 언어가 이념의 언어로, 십자가의 고백이 정죄의 구호로 변질된 것은, 교회의 영혼이 어두워졌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습니다.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준엄한 시험 속에서 침묵 대신 분노를 택했고, 연대 대신 고립을 택했으며, 마침내 이웃을 향한 혐오와 음모론을 복음의 이름으로 포장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언어’(사랑·공의·자비·겸손)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구조개혁의 청사진도 허공에 맴도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제도 이전에 우리의 입술입니다. 언어가 곧 신학입니다. 권세와 탐욕을 담아냈던 금관의 언어를 벗어던지고, 섬김과 고난의 가시관을 다시 쓰는 언어의 회심이 우리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말이 바뀌면, 비로소 길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Ⅱ. 균열의 시작 ― 강단에서 먼저 흐려진 단어들
균열은 강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보의 짧은 공지, 목회자의 짧은 회중기도, 그리고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한 SNS 문구들까지, 일상의 언어가 혐오와 적대의 독소로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는 고난 받는 이를 향해야 했을 주님의 자비와 공의의 단어들이, 특정 정치 진영이나 젠더, 지역, 혹은 이주민을 향한 날카로운 심판의 칼로 벼려졌습니다.
3화에서 반공주의를 복음으로 혼동했던 원죄적 언어의 계보는, 11화에 이르러 이념의 신격화라는 더욱 정교한 언어적 변이(變異)를 일으켰습니다. 과거에는 공산당이라는 외부의 적을 향했다면, 이제는 같은 공동체 내의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사탄의 무리로 낙인찍는 내부의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이 독소는 진리성이라는 마땅한 기준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강단에서 터져 나온 숱한 음모론과 사실 무근의 통계 인용은, 교회를 지성의 공동체가 아닌 맹신의 집단으로 스스로 고립시켰습니다. 우리의 말이 세상의 지표 위에서 신뢰를 잃을 때, 그 무게는 곧 영혼의 무게였습니다. 기윤실·갤럽 2023년 조사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낮은 신뢰도는, 교회의 입술이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통렬히 반성하게 합니다.
Ⅲ. 광장과 예배 사이 ― 언어가 방향이 될 때
언어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언어는 곧 방향이며, 우리가 어떤 존재를 향하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광장의 분노와 혐오의 언어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언제나 최소자를 향합니다. 누가복음 4장의 예수님의 선언이 그러했고,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금관의 언어는 언제나 권력의 정점을 향해 발화합니다. 그것은 타자를 정죄하고, 심판하며, 자신들의 독선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봉사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공의, 자비, 겸손의 4대 어휘는 단순히 윤리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방식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폭력이 되고, 자비가 없는 겸손은 무기력이 됩니다. 교회가 이 언어를 잃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의 모든 대화 채널을 닫고,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향하는 곳이 우리의 신학이며, 우리의 길이었습니다.
Ⅳ. 상처의 초상 ― 세 장의 작은 기록
우리는 강단과 기도 속에서 혐오 언어가 어떤 구체적인 상처를 남겼는지, 세 장의 작은 기록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혐오를 복음으로 바꾸는 언어적 변형의 연금술은, 이 상처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첫 번째 기록은 선동적 설교의 비극입니다. "저들은 악한 세력이니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라는 단정적 심판의 언어는, 청중의 마음속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제거하고 맹목적인 편 가르기만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서로 다른 견해 속에서도 진실과 이웃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며 평화롭게 지내기를 소망합니다(롬 12:18)"라는 화해와 진리성의 언어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타자의 멸망을 선포할 자격이 없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회중 기도의 타락입니다. 예배의 중심에서 드려져야 할 기도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정치 집회의 연설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피해자 중심의 자비와 연대의 언어 대신, 독선적인 승리와 정죄의 언어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특정 정권의 실패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고난 받는 이주 노동자와 장애인들의 존엄이 세워지도록" 기도하는 공적 책임의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 번째 기록은 SNS 속의 거짓의 영입니다. "특정 백신이나 정책은 사탄의 음모입니다"라는 출처 없는 음모론의 유포는, 교회의 진리성을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우리는 이를 "우리는 과학적 사실과 공적 기관의 지침을 존중하며, 재난 상황 속에서도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지키겠습니다"라는 진리성 및 공공선의 언어로 고백해야 합니다. 언어의 회개는 사전 팩트체크라는 지루한 윤리적 과정부터 시작됩니다.
Ⅴ. 잊힌 사전 ― 하나님 나라의 말들
우리는 금관의 권위를 내려놓고, 잊힌 하나님 나라의 사전을 다시 펼쳐야 합니다. 이 사전에는 사랑, 공의, 자비, 겸손이라는 네 개의 핵심 동사 외에도, 7가지의 실질적인 회복의 언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성을 향한 고집, 비폭력을 향한 서약, 공공선을 향한 지향, 연대를 향한 손길, 그리고 현실의 절망을 넘어선 소망의 언어입니다. 이 언어들은 타인을 향한 조롱이나 낙인이 포함되지 않았는지, 인용되는 통계가 분모와 출처를 명확히 명시했는지, 설교의 논지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일치하는지를 매일 점검하는 겸손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이 과정이야말로 금관의 언어를 벗고 가시관의 언어를 다시 쓰는 영적 훈련입니다. 금관의 언어가 심판하고 분리하는 문법이었다면, 가시관의 언어는 경청하고, 공감하며, 무너진 곳을 찾아가는 섬김의 문법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회개는 우리가 매일 쓰는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Ⅵ. 되돌아오는 길 ― 제도보다 먼저, 입술부터
언어의 회복은 교단 차원의 거대한 제도 이전에, 목회자와 회중 각자의 입술에서 시작되는 회개 운동이어야 합니다. 제도는 언어의 회심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할 뿐, 그 불씨 자체는 개인의 겸손에서 피어납니다.
우리는 먼저 언어 윤리 헌장을 제정하여, 선거철 특정 정당 지지 발언의 금지,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발언에 대한 징계 절차 등을 공식적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교회 SNS는 '전도'보다 '섬김'의 콘텐츠를 70% 이상 편성하고, 모든 콘텐츠에 출처를 명확히 표기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준칙을 세워야 합니다. 오류가 발견되면 7일 이내에 동일한 채널로 공식 정정 공지를 내는 것이, 강단 권위의 겸손한 고백이 됩니다.
예전(禮典)의 언어 역시 개편되어야 합니다. 회중 기도의 샘플 문안을 배포하고, 고난주간이나 재난주일의 문안 예시를 통해 권세의 언어를 배제하고 피해자 중심의 자비와 연대의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말의 영성이 회복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조와 제도는 공의와 사랑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Ⅶ. 작은 빛들의 연대 ― 조용한 장면 세 개
어둠 속에서도 이미 언어의 회심을 시작한 작은 빛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금관을 버리고 가시관을 선택한 교회의 조용한 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공공 인프라로의 전환입니다. 팬데믹 절정기, '감염의 온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일부 교회들은 자신의 주차장과 시설을 지자체와 협력하여 임시 선별진료소나 백신 대기소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만 안전하면 된다"는 배타적인 언어 대신, 예배당을 지역사회의 공공 인프라로 내어주는 연대의 언어를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난민·이주민을 향한 돌봄의 언어입니다. 교단 내의 거친 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 신청자 가정을 위한 무료 법률·의료 지원 센터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이주민을 '잠재적 위협'이 아닌 '돌봄의 대상'으로 정의하는 자비의 언어를 선포했고, 그 언어는 곧 청년 세대와의 조용한 연대를 이끌어냈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청년 패널의 피드백입니다. 어떤 교회는 청년 패널이 주일 설교 원고를 사전에 검토하고, 사실 검증 오류나 혐오적 요소에 대해 가감 없는 피드백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강단의 권위를 회중에게 나누어주는 급진적인 겸손의 언어였으며, 청년들에게 교회의 언어 윤리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이 작은 빛들의 연대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Ⅷ. 에필로그 ― 금관을 벗는 연습
1화부터 11화까지, 우리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금관의 예수를 따르며 권력, 탐욕, 그리고 이념의 늪에 빠져들었는지 추적했습니다. 우리는 권세와 탐욕을 담은 언어 속에서 영혼의 사랑, 공의, 자비,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금관을 쓴 예수는 심판과 분노의 언어를 말했지만, 가시관을 쓴 예수는 침묵과 섬김, 그리고 화해의 언어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멈추는 회심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금관을 벗어던지는 연습은, 우리의 입술에 재갈을 물리는 침묵의 영성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말하지 않고, 세상의 고통과 이웃의 아픔을 겸손히 경청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우리 안에서 다시 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언어의 회심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회복하고, 구조적 타락의 긴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말의 회개 없이는, 그 어떤 제도 개혁도 또 다른 독선과 폭력의 언어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침묵과 회개 속에서, 섬김의 언어를 다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주여, 우리의 입술부터 회개합니다.
주님을 찬양해야 할 우리의 혀가 이웃을 정죄하는 칼이 되었습니다.
권세와 독선의 금관의 언어를 벗고,
겸손과 자비의 가시관 언어를 다시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말이 사랑과 공의, 화해와 연대를 창조하게 하소서
침묵과 경청의 회개를 통해, 주님 나라의 길을 다시 걷게 하소서.
다음 회 예고
말의 회개를 넘어, 삶의 변화를 향한 신앙의 실천 편입니다.
복음은 단지 말로 믿는 진리가 아니라, 살아내야 완성되는 언어입니다.
교회의 언어가 사랑과 공의로 바뀌었다면, 이제 교회의 삶 또한
가난한 이웃의 고통 속으로, 분열된 세상의 골짜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회차에서,
“예배와 삶이 분리된 교회”가 아닌 “삶 자체가 예배가 된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가시관의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언어를 말하고 그분의 길을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걸음이다.
입술의 고백이 발의 순종으로 이어질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의 빛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