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서 삶으로, 회개에서 실천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께 금관을 씌워 권력의 보좌에 앉혔는가?”
한국교회의 80년 역사를 회개의 눈으로 추적합니다.
십자가의 길 대신 권력과 번영의 길을 걸어온 교회의 죄를 고백하며,
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시작합니다.
12화, 우리는 권세와 혐오로 날카로워졌던 입술을 멈추고 침묵의 영성을 배웠습니다. 입술의 회개는 오랜 타락의 역사 속에서 찾은 회심의 첫 단추였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는 아직 시작일 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발의 걸음에서 시작됨을 상기해야 합니다. 언어는 회심의 문을 열었지만, 문을 나서는 행함의 자리까지는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단 한 번도 말의 성찬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병든 자를 만지셨고, 소외된 자와 함께 걸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의 형틀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의 복음은 완성된 이론이나 미려한 수사학이 아니었고, 온몸으로 살아낸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교회는 다시 회복을 논하고 있지만 그 발걸음은 여전히 멈춰 있습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걸음입니다. 다시 살아내는 복음은, 우리 교회가 침묵 속에서 정결해진 입술로 길 위에서 증명해야 할 실천의 신학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12화의 고백을 통해 어느 정도 정결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할 때, 다수의 교회들이 보이는 삶의 회심은 여전히 더디고 미약합니다. 팬데믹 이후 교회의 회복 담론은 온라인과 강단을 가득 채울 만큼 요란했지만, 골목과 병원, 재난 현장에서의 묵묵한 섬김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는 비판이 높습니다. 신앙은 여전히 ‘언어적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을 정의하는 것이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의 양'이나 '내 입술이 외치는 뜨거운 기도 소리'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복음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여, 주여"를 외치는 입술의 열광이 아니라, 강도 만난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걸음이 교회의 본질임을 성경은 줄곧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예배가 회당이라는 성스러운 공간 안에서 완성된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언제나 회당 밖의 길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만남의 현장에서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그 길 위에 서기를 거부할 때, 우리의 신앙은 공허한 언어의 울림으로 퇴색할 뿐입니다.
신학적 무지보다 더 심각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실천의 결핍에 있습니다. 말은 복음을 외치지만, 삶은 그 복음을 부정하는 이 거대한 모순이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린 핵심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은, 교리(Orthodoxy)와 실천(Orthopraxis)이 분리될 수 없는 생명력의 문제임을 천명합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여기서 행함의 신학(Orthopraxis)은 단순히 이웃에게 베푸는 윤리적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가 이 땅에서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현현이며, 우리를 통해 세상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언어가 '신앙의 문법'이라면, 실천은 그 문법으로 지어진 **'신앙의 문장'**입니다. 문법만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문장, 곧 살아 있는 실천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입술에서 완성형 명사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에서 진행형 동사로 끊임없이 운동하며, 은혜의 열매를 맺습니다.
복음을 말의 성전이 아닌 삶의 광장에서 증언한 세 가지 장면을 통해, 실천의 회심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성찰합니다. 이들은 교리적 완벽함 대신, 미완의 순종을 택한 조용한 증인들입니다.
첫 번째 장면, 골목의 성찬 ― 경계를 허문 떡 나눔
한 교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 쪽방촌 골목에서 주민들과 함께 밥을 나눕니다. 이들은 이 식사를 단순히 봉사 활동이라 부르지 않고 '골목의 성찬'이라 부릅니다. 이 행위는 교회 건물의 거룩한 제단에서만 이뤄지던 성찬의 의미를, 도시의 가장 낮은 곳, 상처 입은 이웃의 밥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 성찬에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요란한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서로에게 떡과 국을 건네는 손끝의 예배가 있을 뿐입니다. 교회와 세상, 성과 속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골목이야말로,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오신 현장의 재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 무명 봉사자의 손 ― 희생의 익명성
수많은 교회들이 봉사 활동을 자랑하고 홍보하는 동안, 이름 없는 봉사자의 손은 묵묵히 움직였습니다. 도시락 배달 봉사 팀의 청년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섬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수식어 대신, 그저 '친절한 자원봉사자'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익명성을 택한 이들의 섬김은, 목회자 'CEO화'와 성공주의의 금관을 향한 교회의 타락에 가장 강력한 반증이 됩니다. 그들의 손은 명사를 동사로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조용히 시현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장면, 상처 입은 이웃과의 연대 ― 함께 앉는 존재
재난과 차별의 현장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금관의 언어는 여기서 '위로의 언어'를 외치며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이웃과 연대한 교회들은 '함께 앉는 존재'가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이념적 갈등으로 고통받는 이들, 혐오 발언으로 상처 입은 소수자들 곁에서, 어떤 설명도, 어떤 구호도 없이 그저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 침묵의 연대는, "네가 나를 위해 말해주지 않아도, 네 존재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된다"는 복음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금관을 쓴 예수는 입으로 명령합니다. "이대로 하라"고 선포하고, "너희는 심판받아 마땅하다"라고 정죄합니다. 금관의 권세는 손을 내밀어 만지기보다, 손을 들어 군중을 통제하려 합니다. 그의 신앙은 완성된 교리 안에 머무르며, 순종을 강요하는 권위의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가시관을 쓴 예수는 손으로 어루만집니다. 문둥병자의 손을 잡으셨고, 죽은 소녀의 손을 일으키셨으며,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기셨습니다. 실천은 바로 이 가시관의 손, 섬김의 손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세속적 권세의 포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권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는 이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완성된 신념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오늘도 이 길을 걷고 있다'라고 고백하는 미완의 순종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설득하려 들기 전에, 먼저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외쳐야 할 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의 상처와 이념의 광기, 혐오의 언어(12화)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한국교회는 이제 다시 ‘길 위의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다시 살아내는 복음은, 우리에게 교회가 단지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하며 걷는 공동체'임을 깨닫게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곧 살아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향하는 곳이 우리의 신학이며, 우리의 섬김이 닿는 곳이 하나님 나라의 경계입니다. 침묵 속에서도,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세상에 말을 걸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12화에서 배웠던 하나님 나라의 언어(사랑, 공의, 자비, 겸손)는, 입술이 아닌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손끝과 발끝에서 완성됩니다. 말의 회심을 넘어선 삶의 회심을 통해, 교회는 비로소 세상의 신뢰를 되찾고 금관을 벗은 주님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입술로만 찬양했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말보다 사랑을, 이론보다 섬김을 택하게 하소서.
가시관의 예수를 따라, 금관의 길을 버리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기도가 되고, 우리의 걸음이 예배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하소서.
세상이 우리를 보고 주님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가 다시 살아내게 하소서.
다음 회 예고
말의 회개가 삶의 회심으로 이어졌다면,
이제 복음은 ‘나’의 구원을 넘어 ‘우리’의 부활로 걸어갑니다.
교회는 다시 길 위로 나서야 합니다.
그 길은 제단의 통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문입니다.
세속의 빛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 빛을 심는 교회.
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동행의 언어로,
권세의 집이 아니라 관계의 집으로 다시 서는 공동체.
14화는 이 여정을 시작하는 **“에클레시아의 재탄생”**을 다룹니다.
신앙의 행위가 어떻게 공동체적 실천으로 변모하며,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의 언어로 다시 걷는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