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영어에 “pencil in”이라는 표현이 있다. ‘예정하다’라는 뜻이다. 다음 일을 예정하며 스케줄을 만들어 놓을 때 주로 쓰인다.
그런데 그냥 예정한다는 뜻은 아니고,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이라는 말을 붙이면 더 정확한 뜻이 된다.
즉, ‘나중에 상황이 변할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은 예정해 놓자’하는 말이다.
왜 동사로 ‘pencil’(연필)이 쓰였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연필로 플래너에 일정을 적으며 ‘일단은….’하며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그려진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네 살 쯤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날쯤이었을까. 엄마는 이제 글자를 배울 때가 되었다고 했다. 어느 날 엄마가 공책과 잘 깎아진 연필을 준비해 주었고,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우리 언니가 오늘부터 글자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첫날, 내 이름을 쓰는 법을 배웠다. 방바닥에 엎드려 깍두기공책을 펴놓고, 언니가 내 이름을 적어준 것을 보고, 다리를 까딱까딱하며 내 이름을 그렸던(!) 기억이 있다.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이제 까막눈이 아니라는 당당함과 함께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언니처럼 샤프와 색깔 볼펜을 쓰고 싶었던 부러움이다.
엄마에게 나도 연필 말고 다른 걸로 쓰고 싶다고 하면, 글씨가 못나진다고, 너도 언니처럼 크면 그렇게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좌절했다. '나는 4살인데! 5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곧 모아둔 용돈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은밀히 샤프와 볼펜을 샀다. 집에서는 연필을 썼지만, 학교에서는 그 비밀 아이템들을 썼고, 덕분인지 명필은 아니다.
지금은 어디 가서 글씨 쓸 일이 있으면 좀 신경이 쓰인다. 그때 엄마 말씀 잘 듣고 연필로 계속 써볼걸 그랬다.
글씨 쓰기 입문자인 어린이들에게 연필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딱 이것일 것이다. 지울 수 있으니까.
능숙하지 못해서 실수를 하거나 모양이 마음에 안들 때, 얼마든지 지우고 다시 고칠 수 있으니 초심자에게는 너무나 좋은 도구이다.
점점 클수록, 아이는 이제 연필을 점점 덜 쓰다가 고등학생쯤 되면 수학 문제를 풀 때 말고는 거의 볼펜을 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들은 더 일찍 펜만 쓸지도 모르겠네.
주로 연필을 사용하던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되어 펜을 사용하는 것은 어쩜 우리가 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를 나타내는 메타포 같다. 실수가 용납되고 잘못을 저지르며 배워가는 어린 시절과 더 이상 그런 것들은 용납되지 않는 어른의 삶.
‘이제 나는 어른인데!’하고 또 좌절한다. 어른에게도 연필이 필요하다고.
“Pencil in”
이 말 자체에는 어떠한 긍정적인 의미가 없지만, 나는 이 말을 발견하고 나서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내가 느껴왔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은 하기로 적어놔야지, 연필로.
바뀌게 되는 상황은 내 몫이 아니다. 연필로 썼으니 지워질 수도 있겠지.
일단은 해보자 하고 마음먹은 스스로의 기특함에 격려를 얻어볼 생각이다.
이 글을 썼다고 펜보다 연필을 더 많이 사용할 것 같지도 않고 어디 계약서나 공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연필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 해보자’하고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는 있다.
연필로 쓰듯이, 일단은 하기로 할 수 있다. 해보고 나서 또 상황에 맞춰볼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결과에 대한 책임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작은 일상의 일에도 예전보다 계획을 하고 추진하는 것에 주저함이 있다.(내가 그냥 계획형 인간이 아닌 걸 수도 있지만)
그런데 ‘해보자’ 말고 ‘일단 해보자’ 하고 한 단어만 더 붙여도 부담이 덜어진다.
'해보고 별로면 그만하지 뭐'했더니 해보고 좋은 점이 발견되어 계속해나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완벽주의나 불안함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면, 이건 마법 같은 주문이다.
Let’s pencil it in.
*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