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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짓것 Jan 17. 2020

에필로그 : 잃으면 얻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10 추락하는 50대 만년 부장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처음에는 충격이 크다. 주변에 대한 원망을 하기 일쑤고, 객관적인 나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나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온 것이리라. 세월이 흐르면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이 보인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다른 것이 나타난다. 생각의 관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진다. 용기도 생긴다. 만약 내가 잃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지점 같기도 하다.


우선 앞으로 내 길과 목표가 명확하게 보였다. 이제는 출세보다 나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승진하였다면 나는 아마 멀지 않아 끝나게 될 직장 생활 동안 가짜의 나를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나를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담대해졌다.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니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되어도 대담하게 적응할 것 같다. 백신을 맞은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퇴직이든 강등이든 사고든 견뎌낼 것 같다. 출세를 내려놓으면 그다음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허상보다는 실속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눈치 보이지도 않는다.


진지하게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다. 회사일에 대한 중압감과 스트레스에서 좀 벗어나 진짜 중요한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다. 회사일로 등한시했던 가족도 보이고, 힘 있는 사람보다는 진실한 후배 직원도 보이고, 흥청망청 보냈던 시간도 소중하게 느껴지고, 퇴사 후 준비와 고민의 시간도 늘어날 것 같다.


소중한 사람에게 시간을 내는 것이 아깝지 않아 졌다. 그동안은 덜 소중하지만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 막연한 기대를 안고 시간을 투자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소중한 사람은 내가 어떤 상황이 되어도 묵묵히 나를 대해줬다. 같이 무언가를 하자면 했고, 내가 기분을 좀 언짢게 해도 받아주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이런 경험이 별 것도 아니고 보약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개운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마음도 많이 편해지고 너그러워졌다. 누구를 원망한 들 문제는 풀리지 않고 더 꼬이기만 한다.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나를 돌아보는 게 더 낫다. 타인은 그냥 타인일 뿐이다. 타인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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