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변주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살면서 이런 뼈조언을 누군가에게 직접 들어본 일이 있는가. 운 좋게도 이런 조언을 일찌감치 들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안일한 태도와 습관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어느 석학 교수가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로 남긴 메시지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직업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4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느낀 바를 축사를 빌어 자신의 후배들에게 전했다. 그들이 곧 사회에서 맞닥뜨릴 주요 난관에 대해, 개요 짜듯 성글지만 큰 획을 담아 던져졌다. 제대로 명중한 덕에 청중은 그 자리에 있던 졸업생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말을 읽고 전해 들어 가닿은 나를 포함한 대국민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이십 대는 변덕스러운 우연을 필연으로 오해하거나 이미 지쳐버린 타인을 마음에서 놓지 못해 속앓이 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본마음이 달라도 드러내지 못하는 비겁한 속내를 감추느라 정작 나에게만은 모질던 나를 마주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변해감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우연과 타인은 처음부터 내가 부릴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단지 우연한 기회가 예고 없이 눈앞에 펼쳐졌고, 손을 뻗어 닿을만한 곳에 미지의 타인이 있던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모든 것이 신기루 같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앞의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가지 쳐내듯 끝맺는 데에 급급하다 보면, 이면의 나를 살피는 일에는 무심하다 곧 무뎌진다. 언제부턴가 구체적 목표의 실현이 늘 우위에 있는 삶의 궤적은 어쩐지 크게 궁금해지지 않았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공식 같은 삶의 경로 곳곳에 나를 위한 변주가 필요하다. 경로를 이탈하겠다는 선포까지는 아니어도 고정값에만 매몰된 채 서서히 잠식될 수는 없으므로.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남과 나의 비교 말고, 10년 전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길 바란다. 동시에 10년 후의 나를 건재할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온전한 하루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무례한 인간을 향해 웃으며 대처할 날도 머지않아 온다.
각자도생의 시대라 해도 개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축적된 경험이 모여 사회적 맥락의 토대를 이룬다. 이토록 현장감 있는 축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면, 아직 단념할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허준이 교수의 말은 자칫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을 우려와는 정확히 반대 노선을 향한다.
오만함이나 권위 의식 같은 건 1g도 찾을 수 없는 대신 진중하고 겸손하며 진솔한 넋이 배어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잘 헤아려진다. 글을 대하는 태도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글이란 응당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일렁이게도, 식어가게도 하는 보편적 특수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Unsplash@Raphhel_Lo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