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피아노 소리가 이상해.”
아이가 피아노를 치며 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피아노를 배운 적 없는 내 귀로는 들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건반의 높이가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외관에 문제가 생기니 그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4년 전 언니에게 받은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욕심이 나서 받았지만 5살인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기엔 나이가 어렸고 나도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우리는 그저 피아노가 생긴 것이 신기하고 재미나서 장난스레 쳐보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피아노는 가구처럼 여겨졌다. 가끔 긴 의자만이 아이의 책상이 되거나 공연무대로 쓰이곤 했다.
최근 옮긴 아이의 피아노 학원에 물어 조율 기사의 연락처를 하나 받았다. 전화를 하니 내가 사는 지역은 당분간 방문 일정이 없다고 했다. 급한 마음에 건반 상태를 설명했다. 그는 난방하는 시기에 나무가 건조해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안에 물을 넣어두면 된다고 답해주곤 전화를 끊었다. ‘안에 물을 넣어두라고?’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클래식 피아노는 나무로 만드는데 그 안에 물을 넣어둔다니 자칫 물이 엎어져서 내부가 썩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2주 정도 지나자 저장해 둔 그의 번호로 핸드폰이 울렸다. 방문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이른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율사는 은색 가방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60을 넘긴 듯한 외모가 조율에 있어서는 더 전문가로 느껴졌다. 기대감을 안고 거실 한 편으로 안내했다. 그는 피아노 의자를 물리다 말고 의자의 뚜껑을 열더니 가지고 온 가방의 도구로 안쪽 연결부위를 조이기 시작했다. “나사가 풀린 상태로 계속 쓰면 완전히 망가집니다” 의자가 다 조여지자 피아노 건반 상태를 살피며 두드려보았다. “조율이 문제가 아니라 관리가 안 되어 있네요.” 이번에는 피아노 위 뚜껑을 열더니 책처럼 꽂힌 나무들을 통째로 덜어냈다. 그러고 나서 건반들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건반을 두드리며 나사만 조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해체되는 피아노를 보고 당황했다. 한편으론 평소 보지 못한 피아노의 내부를 보는 것이 신기했다. 건반의 안쪽은 길게 나무와 연결되어 있었다. 들어낸 자리에는 그 나무 부분의 구멍에 꽂혀 고정되도록 쇠막대들이 간격을 두고 줄지어 있었다. 기사는 붓과 청소기로 안에 있는 먼지를 제거하며 쇠에서 조금씩 나오는 먼지라고 했다. 습도에 따라 소리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오래 두면 안에 있는 장치들도 상한다고 덧붙였다.
나에게 오기 전부터 수십 년간 쌓여왔을 먼지를 보며 이곳에 이사 오던 날이 생각났다. 결혼하고 나서 10년만 이었다. 신혼살림만 간단히 있던 것이 아이가 생기며 물건이 하나둘 늘더니 어느새 배가 넘게 불어나 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정리를 시작했지만 10년 살림을 단번에 줄이는 것은 무리였다. 이삿날, 집안 곳곳 숨어있던 작은 짐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업체에서는 인원을 한 명 더 불렀다. 거리가 짧아 이동은 쉬웠지만 짐 정리가 남아있었다. 그 많은 짐들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다 결국 몇 개의 상자는 그대로 두고 가라 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까지 온종일 짐을 정리했다. 책이나 장난감 같은 아이 물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두 번 쓰고 만 물건이나 중복된 물건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도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쉽게 들이기만 한 자신을 스스로 탓했다. 그런 물건들은 먼지처럼 조금씩 쌓여 결국에는 문제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피아노가 좋은 소리를 연주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집 또한 편안하게 머물기 위함인데 나는 그동안 물건들을 잘 관리하고 보살폈는지 돌아보았다.
조율사는 청소가 끝나자 건반을 일일이 끼워 넣으면서 건반 간 간격과 앞, 뒤쪽의 높이를 살펴보았다. 구멍이 있는 동그란 종이를 쇠막대에 하나씩 끼워 넣으며 신중히 조정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시작한 작업은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정작 조율은 큰 문제가 없어 30분 정도에 마쳤다. 그 사이 아이도 하교하여 집에 돌아왔다. 기사는 도구를 챙기면서 아이에게 한번 쳐보라고 권했다. 쑥스러운 듯 자리에 앉은 아이는 최근 배운 바이엘 55번을 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귀에도 소리가 맑게 들렸다. 달라진 울림은 묵은 때를 벗겨내고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조율사가 소리가 마음에 드는지 묻자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단 부분을 열어 물을 담은 페트병을 넣어주었다. 여름에는 그대로 있다 난방하는 시기에는 알아서 습도 조절이 될 것이라 했다.
그사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왔다. 이참에 밀린 빨래를 모아 세탁기를 돌렸다. 베란다에 깨끗해진 옷들을 털어 널었다. 내 마음도 소리를 되찾은 피아노처럼 조금은 정리된 하루였다.
끝.
(13.2장)
*** 이 글은 성북문화원 문예창작 수업 시 합평을 받아 마지막 단락을 삭제한 글입니다.
남명희 선생님과 글 동무들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