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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분

징계위원회

by 함태진


<2014년 5월 22일>

회사가 난리 법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유의 사태라고 한다... GM이 되면 상상도 못 했던 일들도 다루게 된다고 얼핏 들었었는데 이 경우가 그중 하나가 아닐까?... (중략)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나중에 이 일을 돌아보며 두고두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14년 5월, 말레이시아 지사의 인사팀 메일함에 익명의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일부 직원들이 여자 동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단체 대화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회사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게다가 그런 대화방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중간 관리자급 이상이라니. 선뜻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회사에서 십 수년 이상씩 일해오던, 동료들의 신뢰를 받는 이들이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즉시 본사에 해당 제보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리고 인사팀장, 법무팀장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관련자들이 증거를 없애거나 말을 맞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조사와 인터뷰는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다. 외부 법률 전문가들까지 불러서, 조사의 방식과 순서를 치밀하게 계획했다.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다

관련자들을 한 명씩 불러 조사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동자, 적극 가담자, 그리고 단순 참여자들이 있었다. 특히 주동자들은 회사에서 터줏대감 대우를 받는 고참들이었다. 평소에는 선한 얼굴로 조직을 이끌던 그들이, 뒤에서는 몰래 동료 여직원들을 희롱하고 폄훼하는 행동을 즐겼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조사가 점차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면서 직원들도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씩 눈치채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 직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 나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새로 온 사장이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리더들을 몰아내려 하고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 사람들을 해고하기 위한 핑계를 만들고 있다."


지나친 억측이나 터무니없는 소문에 대해 속이 상했다. 사실관계를 즉각 밝혀서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법무팀과 인사팀 모두 이를 극도로 만류했다. 조사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사건의 민감성 때문에 정보의 공개에 대해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회사가 법적 문제에 휘말릴 소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비위를 저지른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이야기를 왜곡해서 다른 직원들에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여론전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 직원들이 비위 행위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거나 심지어 그들을 옹호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화도 났다.


그 와중에도 회사의 비즈니스는 지속해야 했다. 하지만 다수의 사업부 임원과 영업팀장급들이 비위에 가담했던지라, 이 기간 동안 회사의 영업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성과에 대한 부담은 모든 직원들이 함께 감당해야 했다.


실적에 대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회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감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회사와 직원들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결정의 무게

마침내 조사가 모두 마무리되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글로벌 본사에도 지속적으로 조사 경과에 대해 보고해 왔기 때문에, 이 사건을 어떻게 종결지을 것인지는 본사의 최고위층까지 주목하는 초미의 관심사항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그 누구도 결정을 대신 내려줄 수는 없었다. 나의 상사였던 아시아본부 총괄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Taejin. You have to make up your mind. And you have to own your decision.”
태진. 결론은 네가 내려야 해. 그리고 내려진 결정은 전적으로 네 것이어야 해.



판단의 기준

두 가지 판단 기준이 있었다: 하나는 법적인 관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라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치라는 관점이었다.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외부의 법률자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과도한 징계는 향후 법적 분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조치를 권고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회사는 법원이 아니며, 내가 할 일은 형사재판의 판사가 되어 법적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관련된 개개인들이 개별적으로 법정에 문제제기해서 거기서 따질 일이었다.


회사의 결정권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회사라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이었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회사의 리더로 남아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Photo credit: unsplash.com/@tingeyinjurylawfirm


결정과 그 여파

며칠 뒤, 최종 결정을 내리고 그 내용을 인사공지를 통해 사내에 발표했다.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임원을 해고했다. 적극 가담자들은 직위 강등시켰고, 그들 대부분이 곧바로 회사를 떠났다. 단순 가담자들에 대해서는 경고조치를 내렸다. 그들 중 일부는 회사를 떠났고, 일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사에 남았다. 일반 직원들 중에서도 비위행위자들을 옹호했거나 동정했던 이들 중 일부가 회사를 떠났다.


남아있는 많은 직원들은 예상보다 단호한 회사의 조치에 충격을 받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과연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수습해서 비즈니스를 끌고 갈 것인지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전 직원 미팅을 소집했다. 사건의 전모를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왜 이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에 대해 남은 이들에게 최대한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것입니다.”


재건의 시작

사건의 1막이 일단락되고 나서, 남은 것은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리더십 아래에 조직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능력 있고 회사의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많은 직원들에게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여럿을 부서장 혹은 팀장으로 새롭게 발탁했다. 또 외부에서 경험이 많고 인품이 뛰어난 인재들도 일부 영입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조직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다행히 내부에서 새로 발탁한 리더들과 외부에서 영입한 노련한 리더들이 의기투합했고, 직원들 사이에서는 다시 좋은 회사를 만들어 보자는 의욕이 싹텄다. 그 덕분에 회사는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갔다.


그해 하반기, 말레이시아 지사는 기록적인 성과를 올려 지켜보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한해를 마감하는 사내 행사에서 우리는 글로벌 본사의 CEO로부터 깜짝 편지를 받고서 모두 놀랐다.

“많은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한 해를 보낸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특히 올해 여러분의 성장세는 시간이 갈수록 더 가속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Dear Colleagues at Lilly Malaysia,
Congratulations on an outstanding year! Despite a number of challenges, nearly all of your growth products left the competition in the dust… (중략)… If this weren’t impressive enough, your growth actually accelerated as the year progressed. Your hard work has made a big difference for our company and for the people of Malaysia… (중략)… Again, congratulations, and thank you for all you do!”


CEO의 깜짝 편지도 감동이었지만, 직원들이 직접 내 결정을 지지하고 나의 용기에 감사하다고 말해줄 때는 더욱더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 나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 출장을 오거나 여행으로 방문할 때면 잊지 않고 나를 찾아 주고,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해 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에필로그

상상할 수 없던 사태가 벌어졌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 역시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오랜 기간 동안 회사의 리더 자리에 있으면서 ‘좋은 동료’의 가면을 썼던 이들이 저지른 일이었기에, 그들의 실상을 정확히 모르는 일부 직원들이 그들을 오히려 동정하거나 옹호하는 점이 가장 마음 아팠다.


하지만 결국 불의한 이들은 모두 회사에서 뿌리 뽑혔고, 새로운 리더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자 회사는 탈바꿈했다. 처음 지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회사를 바꿔보고자 몇 개월동안 고군분투했지만 수년간 지속되어 온 회사의 부진한 성과와 분위기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 회사가 획기적으로 재정비되고 나자 모든 것이 빠르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가 그 점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10여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복기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그때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오늘을 되돌아보았을 때도, ‘힘들고 불안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다 잘 되었구나’라며 안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5년 1월)



Cover image: unsplash.com/@wesley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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