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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ㅣ Oct 26. 2023

이성에 근거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 모나드론

La Monadologie

 독일의 철학자이자 법학자, 과학자, 수학자, 역사학자, 외교관인 라이프니츠는 바로크시대 유럽의 마지막 만능석학이자 천재들 중에 천재이다. 그는 곱셈과 나눗셈이 가능한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였으며, 뉴턴과 다른 독자적인 방식으로 미적분을 창시하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던 라이프니츠는 철학사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라이프니츠가 살던 17세기 유럽은 르네상스의 물결이 휘몰아쳐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큰 혼동을 주고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중세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무수하게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존 중세철학의 세계관과 과학과 기하학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현대에서도 물론이거니와 당시에 중세철학의 집대성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라이프니츠는 토마스의 철학을 시대의 정신에 부응하여 수용되기 쉬운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였다. 1714년에 집필된 <이성에 근거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와 <모나드론>은 오랜 시간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세계관을 확립해 간 라이프니츠의 마침표가 되어주는 저서들이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3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창조한 실체, 사유하는 실체, 연장된 실체. 창조한 실체는 무한자이자 모든 것의 근거, 신이었으며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는 인간의 정신, 연장된 실체(res extensa)는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물질성을 나타냈다. 인간을 정신과 신체가 결합한 심신이원론의 구조로 본 데카르트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뇌의 송과선이라는 부위에서 이러한 작용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지만,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방식은 정신과 신체를 하나의 단순실체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통합된 단순실체는 물질이어선 안된다. 끝없이 분절되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 조각은 생명도 없고 비활성적이며, 외부의 힘 없이는 운동할 수 없다. 단순실체는 생명이나 역동적인 힘을 소유해야만 한다. 단순실체에게 힘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떠한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되므로 근본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단순실체는 물질적인 것이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참된 단순실체는 힘 혹은 에너지와 같은 단자(Monad)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모나드는 복합적인 것 안에 있는 단순실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복합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단순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복합적인 것은 단순실체들의 무더기나 집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분이 없는 곳에서는 연장도 형태도 없으며 나뉠 수도 없다. 그래서 모나드는 자연의 참된 원자이고 한마디로 만물의 원소다. 만물의 원소들 또한 자신의 해체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의 단순실체가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 있는지를 파악할 길은 없다. 어떤 단순실체도 합성된 것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의 단순 실체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지를 파악할 길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나드가 오직 한순간에서만 생겨나서나 끝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모나드는 오직 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고 파멸을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 반면 복합적인 것은 부분에 의해 시작하거나 끝난다." -모나드론 외 p.39


 단자는 비물질적인 힘이다. 단자는 정신적이며 생명적이다. 각각의 단자들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므로 전체상태가 한 번에 변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나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바로 다른 타인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은 단순실체이다. 인간의 정신은 단일성을 가지므로 대상들의 성질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단자의 내부에는 다수의 질적인 변화들이 있어, 일부는 변화하며, 일부는 유지되어 단자의 운동성과 동일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단자론을 주장하던 라이프니츠에게도 데카르트와 비슷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힘과 같은 단순실체인 단자는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 라이프니츠는 단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대답하였다. 단자들은 창이 없는 단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자들이 서로 연합하여 질서 정연한 우주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라이프니츠는 단자들이 창조될 때에 이미 단자들의 내부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질서 맺어짐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답했다. 단자들은 신의 '예정 조화(pre-established harmony)'로 이루어져 있다. "단자들은 제각기 연주하며 제각기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서로 듣지도 볼 수도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악보에 따라 완전한 화음을 이룸으로써 듣는 이에게 그들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놀라운 조화를 볼 수 있게 한다." 각각의 단자는 자신의 목적만을 따라 교류하는 것이 아닌, 연합하며 질서 정연한 우주를 형성한다. 각각의 단자는 분리된 닫힌 소우주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자 안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있지만 이를 통각(apperzeption) 하지 못한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한한 단순실체(정신)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우주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만을 가진다. 단자들은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대부분 이것을 통각하지 못하고 무의식의 상태로 있다. 라이프니츠는 단자의 상태변화를 'perzeption', 의식이 수반된 상태변화를 'apperzeption'이라 하였다. perzeption과 apperzeption이 일치하는 실체는 오로지 무한한 시선을 가지는 무한자이며, 무한자는 둘로 쪼개질 수 없으니 유일하며 근원적이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apperzeption이 더 많이 이루어질수록 근원적 법칙(신),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단자 내의 apperzeption이 아닌 perzeption은 무의식의 상태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후에 쇼펜하우어 그리고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무의식의 이론의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통일이나 단순실체 안에서 하나의 다수성을 포함하고 표상하는 경과상태는 사람이 지각(perzeption)이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뒤이어 보는 대로 통각(apperzeption) 또는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지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실수는 정신들만이 모나드이고, 짐승들의 영혼이나 다른 완전현실물체들은 없다는 가정을 낳았다. 그리고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의식 상태를 대중적인 관점에 따라 죽음과 혼동하게 했으며, 영혼이 물체와 철저하게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스콜라적인 선입견과 영혼도 죽는다는 왜곡된 견해를 강화시켰다. ... 사람은 그 밖에도 지각과 지각에 의존하는 것은, 말하자면 형태와 운동과 관련해서는 역학적인 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의 기계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동일한 척도의 비율로 확장된 물레방아 안처럼 사람이 그 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를 전제로 기계의 내부를 검사하면 우리는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부분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지각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단순실체 안에서 찾아야 하고 복합실체나 기계에서는 찾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오직 단순실체들 안에서, 말하자면 이것에서 지각과 지각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안에서만 단순실체들의 모든 내적 활동이 존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나드론 외 p.42


 세계의 질서를 신의 예정조화로 생각했던 라이프니츠. 그의 사상에서 신은 완전성이자 옳음, 만물의 법칙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최선의 세계'를 창조다. 인간에게 악처럼 보이는 것은 신의 관점에서는 최선이라 생각하는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무척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신의 은총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 속에서 이러한 낙관론을 찾아보기는 많이 힘들어진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순응과 인내는 그 의미가 많이 변화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우리들은 선과 악의 문제보다는 자극적임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최선이라 생각하기엔 인간 본연의 의미를 잃어가며 기계적인 삶을 살게 되지 않는가? 천재 라이프니츠가 현대사회에 온다면 우리에게 어떤 날카로운 비판을 해주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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