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제대로 마주하기'는 애초부터 끝이란 건 없었다.
호수뷰와 시티뷰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오피스텔 고층으로 이사했다.
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브랜드 오피스텔에, 원룸이지만 침실과 거실 중간에 슬라이딩도어가 있어 공간분리가 되고, 평수가 큰 편인데다 주방이 일자로 길게 뻗어있어 활용도가 좋았다. 화장실은 전에 살던 곳보다 좀 작았지만 샤워부스도 있고 혼자 사용하기에 작진 않았다.
무엇보다 낮과 밤의 뷰가 매우 예뻤다. 특히 밤에는 호수 뒤로 펼쳐진 야경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조명음악분수도 해서 구경하기 좋았다. 고층이라 하늘도 가까워보였고, 밤에도 블라인드나 커튼을 치지 않고 야경을 보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롯데타워도 잘 보여서 날씨나 미세먼지 관측도 할 수 있었다. 저층에는 조그마한 공원도 있었고, 5호선 지하철역이 가까웠다. 전에 살던 곳처럼 주변 인프라도 좋아서 슬리퍼 신고 무엇이든 편하게 이용,구매,생활할 수 있었다.
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3,4년 된 오피스텔에 들어간 거지만 신축급이라 깔끔했다. 그러나 전 세입자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펴서 두 번이나 살균소독을 하고 살면서 온갖 방법을 다 써봤는데도 벽지와 가구에서 스물스물 담배냄새가 풍겼다. 결국 옷에도 베고, 피부는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사한 지 일주일 됐던 때, 화재감지기 오작동으로 인해 방화문이 닫히는 걸 목격했다.
나는 24층에서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다.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 소방대원분들께서 와서 확인하고 가셨기에 그래도 이 오피스텔은 대처와 확인을 잘 하나보다 생각했다.
화재감지기가 작동하는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오작동이 발생하면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대처와 관리도 소홀히 하는 걸 탓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 후, 또 방화문이 닫히고 경보기가 울렸다. 한 달후에도, 3개월 후에도 계속.....
밤 열두시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심지어 새벽 4시와 아침 6시에도....
이제는 처음처럼 그런 행동과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전에 살던 곳처럼 안일하고 소홀한 태도에 불안은 급속도로 증폭됐다. 입주민 단톡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말에 의하면 날씨 탓이라고 할 뿐이었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별다른 조치도 없었다. 정말 밥 먹듯이 오작동되는데도 안일한 태도에 나는 무력감과 공포감을 느꼈고, 바라던 집에 사는데도 나는 그 집에서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래도 진정 됐지만, 속으로는 불안에 떨어야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무력감이 심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깔끔하고, 감성이 들어간 예쁜 숙소에 가격까지 저렴한 곳을 알게 됐다.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여행을 했으니, 이참에 며칠 여행을 다녀오자 생각했다.
그래서 숙소를 예약하는데, 테마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그 중 번아웃을 선택했다.
선택과 동시에 화재감지기 오작동에 의해 불안해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고, 예상치 못한 것들도 함께 떠올랐다.
가족들의 공감과 존중, 이해가 없는 반응들을 감당하던 나, 동생한테 엄마 좀 신경 쓰라고 잔소리했다가 연 끊자는 말을 들었던 것과 엄마는 울고 있는 나를 외면하고 연락 끊었던 일, 엄마가 쓰러졌고 수술한 일, 가족들을 배려하느라 힘든 티도 못 내다가 끝내 힘들어하니 너까지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던 아빠, 영혼 없이 사과해놓고 사과 안 받아준다고 성질내다가 끝내 내 앞에서 무릎 꿇는 엄마까지.....
그때도 언제부터였는지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가족들로 인해 번아웃이 심해졌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집 때문에 무력감과 공포를 느껴서 불안이 심해져서 번아웃이 다시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떠났다.
남자친구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인천 강화도에 갔다.
5박 6일이면, 다른 호텔이었으면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을텐데 합리적인 가격으로
그것도 깔끔하고, 오래되지 않은 건물에, 감성까지 있는 숙소에서 약 일주일동안 지내며 강화도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뜻밖의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양한 성향에서 비롯된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을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듣는 것도 좋아해서 그런 시간을 뜻하지 않게 보낼 수 있게 되어 그 시간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각기 다른 가치관이나 생각들을 들으며 알쓸인잡을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사고방식도, 취향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한 자리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듣다니. 최근 1:1이나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의 대화가 많았는데, 다수의 그것도 비슷한 사람끼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시간 (정확히는 난 듣느라 정신 없었지만)은 참 오랜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과는 진솔한 대화를 나눈 시간들도 있어서 정말 알찬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뜻밖의 선물이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힘들 때마다 다시 충동적인 생각이 들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게 되는 기억으로 남았다.
별주머니 속 별 하나가 늘어난 셈이었다.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해주던 사람, 뜻하지 않게 나의 심정이 들어있던 동화책과의 만남, 스쳐지나간 사람들, 불면증이 치유될 만큼 잠 잘 오던 숙소,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던 강화도까지. 모두 좋았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참 많은 걸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온수리 성당에서의 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온수리 성당에 내리자 갑자기 비가 마구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고, 우산을 써도 비가 몸을 덮쳤다.
비바람을 뚫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둘러보니 한옥의 고즈넉함이 느껴졌고, 그 고즈넉함에 압도 당했다.
안온, 평화, 고요, 포근함, 잔잔함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데도 무섭지 않고 도리어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애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애써 생각을 떠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며 가운데 정면을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있는 예수를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클락션 소음에 미쳤던 그 날의 내가 떠올랐다. 정말 느닷없이.
삶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했다가도 1%의 빛을 보고 여기까지 온 나를 떠올리며 다시 살아보자고 생각하며 일어섰던 그 순간이 마치 방금 전 있었던 일인마냥 생생히 떠오르고 피부로 느껴졌다.
동시에,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생각을 일부러 멈추려고 하지 말라고, 물가까지 가도, 끝까지 가도 구린 모습까지 가도 된다고.
그 말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해도 나는 결국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며, 오히려 생각을 맘껏 한 후에야 정리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한 게 아닐까.
생각의 끝까지 갔었던 그때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이 오버랩되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 끝까지 갔던 그 순간에도 난 빛을 보려고 했어. 그래서 그때 정신을 다시 부여잡을 수 있었던 거야. 나에게 그런 힘이 있었어.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한꺼번에 밖으로 꺼내어진 것 같기도 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울다가 성당에서 나왔다.
그렇게 폭풍우가 치더니, 거짓말처럼 날씨는 잔잔해져있었다.
내 마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눈도, 빙판도 모두 사라진 내 머릿 속 세상에 정신이 팔려 눈치 채지 못한 바람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됐다.
그 거센 바람에 담긴 의미도.
다 성장했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거다.
해피엔딩은 커녕, 성장에는 엔딩이 없다.
나와 제대로 마주하기 역시 엔딩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