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0번째 실험 일기를 쓴다.
이번엔 나의 글쓰기 AI 어시스턴트 호비(Hobi) 없이, 혼자 쓰기로 했다. 제목은 AI와 같이 걷는 길이라고 해놓고선 - 아마 호비가 리뷰했다면 제목부터 수정하라고 제안했을 것 같다ㅜ 하지만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순수한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배움의 깊이와 아이언맨 슈트를 입을 자격의 정비례 관계
<게으른 디자이너의 AI 실험 일기>를 쭈욱 읽어보면 대체적으로 실험 결과가 ‘아쉽다’ 또는 ‘기대에 못 미친다’ 패턴이다. 기대치가 높았던 것에 비해 AI 어시스턴트를 다루는 법을 몰라서 생긴 문제였다.
아쉬운 실험 결과를 통해 배운 것은 -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AI 어시스턴트에게 금손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하려면, 디자이너가 금손처럼 설명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도구를 사용하기 위한 호기심과 연습의 시간이 필요하다.
순수한 배움의 자세로 프롬프트와 툴의 사용 방법을 제대로 익혀야 비로소 든든한 AI 어시스턴트를 아이언맨의 슈트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디자이너의 리더십 훈련
AI 어시스턴트를 디자인 프로세스에 도입해 보자고 실험 초기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는 몰랐는데,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개인 디자이너 혼자 작업할 때의 접근방식이 아니라, 다수가 일을 나눠서 수행하는 팀의 형태로 작업 방식을 쪼개고 관리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MANNG으로 이직한 예전 직장동료가 매니저 포지션을 처음 겪으면서 해 준 조언이 생각났다.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관점으로 업무를 바라보고, 자신이 어떻게 지휘할지 상상해 보라-는 조언이었다. 주어진 과제만 수행하다 보면 전체를 놓치기 쉬운데, 의도적으로 리더의 관점과 생각을 해보는 훈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험 일기를 쓸 때도,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AI 어시스턴트를 찾고, 함께 일하는 방법을 탐구하다 보니까 팀 포메이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어떤 일을 잘하는지, 누구와 함께 일을 하면 좋을지, 결과에 따라 어떤 팔로업을 해야 할지 판단하는 활동의 반복이었다. 프로세스를 스스로 이끌어가는 리더십도 인간에게 주어진 순수한 특권이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식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좋아하는 일만 내가 하고, 어려운 일은 AI 어시스턴트에게 넘겨버리다 보면, 넓게 두루두루 살필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느 순간, 내가 어려워하던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AI 어시스턴트가 가져온 결과물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어쩌지?
인간의 마지막 순수 영역 = 평가와 의사 결정
한참 재미있게 보고 있는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보면, 두 명의 심사위원이 평가 기준을 따라 셰프들의 요리에 점수를 준다.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요리 퍼포먼스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심사위원들은 정당한 평가를 하는데 얼마나 애를 썼을까? 나도 이번 브런치북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실험 활동 끝에 평가(evaluation)를 하다 보니 저절로 심사위원과 공감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 스스로 기준을 정해야 AI 어시스턴트에게 어떤 부분을 덜, 또는 더, 어떻게 발전시켜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AI 어시스턴트의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인간과 대화하듯이 LLM을 통해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백스테이지에서 어떻게 결과물을 만드는지까지는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결과물에 대한 평가 기준을 세워두고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계속 어시스턴트의 작업을 감독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영화감독이 “컷!” 사인을 내리듯, 나도 AI 어시스턴트의 작업 결과물을 수정하고 조합해서 일정한 기준에 도달했을 때 결정을 내린다. 이 결과물은 못 쓰겠구먼, 또는, 이 정도면 쓸만하다! -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 볼까? 하고 의사 결정(decision-making)을 한다.
AI의 예측(prediction)과 자동화(automation) 능력이 비약적으로 진화해서, 인간의 영역을 침범할 거라는 블랙미러 같은 이야기도 있다. 디자이너로써 이런 불안감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서비스를 디자인할 때, 최종적인 의사 결정 단계에 인간의 개입을 추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최종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의 입장에서도, 결국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사람이 결정하도록 디자인하고 싶다. 인간의 마지막 남은 순수한 영역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게으르지만 겁이 없으니까, 괜찮아
서비스 디자이너 글로벌 컨퍼런스가 시작될 때, 헬싱키 시청 건물에서 멋진 네트워크 파티가 열렸었다. 서로 초면이라 서먹했지만, 샴페인을 한 잔씩 마시더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대화를 나누던 디자이너들이 너도 나도 습관처럼 내뱉었던 말이 있다.
“AI도구를 써봐야 하는데~하지만 아직 안 써봤엉ㅋ”
다들 멋쩍게 웃으면서 말끝을 흐리곤 했다. 그때 재밌는 대답이 나왔다.(샴페인을 많이 마신 웃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다음 날 AI 관련 주제 발표자였다!)
“벌써 써봤는지, 아직 안 써봤는지 -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잊지 않는 거야. 디자이너는 항상 불확실한 상황(uncertainty)에 적응해 왔어. AI도 불확실성의 일부일 뿐, 디자이너는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숙제에 집중하면 되는 거야.”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울림이 있었다.
AI 어시스턴트에 대해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직접 들으니 무척 반가웠다.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가 디자인할 때 항상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 - 사람을 위해 우리는 해결 방법을 창작하고, 개선하고, 탐구한다.
익숙하게 따라왔던 디자인 프로세스에 AI 어시스턴트가 추가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새로운 기술이나 툴에 겁먹지 말고, 하나씩 자기만의 방식으로 응용하면 된다 :)
디자이너에게 놓인 숙제, 사람을 향한 디자인.
AI 어시스턴트와 어떻게 풀어갈지 각자의 방법을 탐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