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L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런던 예술 대학)에서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Speculative Design, 미래 디자인) 모듈 수업을 들을 때, 고생이 많았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가는데, 도대체 이걸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게 꼭 필요한 작업인가요?”
“상상보다 현실이 더 급하지 않나요?”
투덜대며 튜터들에게 여러 차례 질문을 던졌더랬다.
다른 과목에서는 그럭저럭 열심히 따라가려고 고분고분했는데, 이 모듈만큼은 의심 50%, 반항심 50%를 품고 마쳤다.
지금은 오히려 그때 미래 디자인의 개념과 연습을 도와준 수업이 참 고맙다. 물론…그때 내가 던졌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은 충분히 많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히려 더, 미래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미래는 어느 날, 오늘이 된다. 그리고 그 미래는 결국 우리가 매일 무언가를 선택하고, 버리고, 바꾸며 조금씩 쌓아가는 오늘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부터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오늘의 방향을 올바로 조율하고 싶다.
질문을 만드는 디자인과 상상을 돕는 도구들
수업을 들으며 욱여넣었던 이론 중 기억에 남는 건?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만드는 디자인이다.
질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전에 언급했던 AI의 헛소리* (hallucination, 할루시네이션)처럼, 조금은 예측 가능한 ‘헛소리’에서 출발해 우리가 지금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비춰볼 수 있어야 한다.
*링크 - https://brunch.co.kr/@rumierumie/106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충분히 있을법한 미래를 구축하고 사람들의 선택과 가치를 드러내는 거울이 되도록 설정하는 것.
미래 디자인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이 여러 가지 있다.
디자인 픽션 (Design Fiction): 픽션이라는 형식을 빌려, 지금의 선택을 ‘미래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이야기
디자인 프롭 (Design Probe): 사용자의 경험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탐색 도구
시나리오 플래닝 (Scenario Planning): 다양한 미래 가능성을 나열하고 전략을 시뮬레이션하는 방법
미래 유물 (Artifacts from the Future): 미래에서 온 물건처럼, 상상의 결과물을 시각화해 보여주는 기법
AI가 도와주는 픽션 쓰기
미래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디자인 픽션을 혼자 구상하다 보면, 가끔 막막하다.
“정말 가능한 시나리오일까?”
UAL 수업을 들을 때도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짧은 기간 동안 관심을 가지는 단순한 하이프(hype) 트렌드인지, 아니면 실제 의미 있는 약한 신호(weak signal)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세상이 온통 메타버스에 열을 올리던 판데믹 시기가 지나자, 메타버스 열기가 확 식어버린 경우를 보자. 미래를 바꾸는 약한 신호가 (weak signal) 외부 요인으로 인해서 기대만큼 성장이 지속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새로운 개념과 신규 서비스들이 단기간에 쏟아지자 대중의 관심을 받은 하이프 트렌드 (hype trend)였을까? 미래의 트렌드가 될 것이다-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만 있을 뿐, 확신하기는 어렵다.
지금처럼 생성형 AI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챗GPT를 사용하면서 두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됐다.
1. 아이디어 프로토타이핑
같은 설정으로 다양한 버전을 빠르게 만들어볼 수 있다. 현실적인 버전, 과장된 디스토피아, 꿈같은 유토피아, 반전이 있는 실험까지 몇 분 만에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2. 리서치 보조
챗GPT를 통해 관련 기술, 사회 동향, 정책 조짐(weak signal)을 미리 살펴보며 시나리오의 현실 가능성을 점검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디자인 픽션은 그럴듯한 상상을 넘어 검토 가능한 사고 실험이 된다.
실제 사례들과 실전 도구들
미래 디자인 수업을 들을 때는 도대체 이 방법론이 “현실에서는 어디에 쓰이지?” 싶었는데, 실제 기업이나 기관에서도 꽤 많이 활용되고 있다. 얼마 전, 런던에서 열린 UX London 2025 이벤트에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을 만났는데 실제 활용 사례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UX London 2025 – Cennydd Bowles, 미래의 디자인과 기술 개발 방향을 살피고 윤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What Could Go Wrong?’ 워크숍 - Cennydd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기술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내기 전에, 그 위험을 상상하고 설계에 반영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는 이야기였다. (워크숍 소개 - https://2025.uxlondon.com/speakers/cennydd-bowles/ )
Kat Zhou의 Dichotomy Mapping - 워크숍에서 소개한 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시나리오를 나란히 배치하고, 각 시나리오가 유발하는 감정, 윤리적 판단, 행동을 비교해 우리가 바라는 방향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Google X의 The Selfish Ledger (2018) - 인간 행동을 기록하고 최적화하려는 상상을 담은 내부 영상*. 이 시나리오는 기술이 자유와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조금 오래된 사례이지만, 워크숍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이 잘 알고 있는 예시였다. (*영상 링크 - https://www.theverge.com/2018/5/17/17344250/google-x-selfish-ledger-video-data-privacy )
디자인 픽션 레시피
픽션을 쓸 때마다 막막할 때, UAL에서 배운 이 프레임워크가 든든한 기준이 되어준다.
Build the world – 세계를 만든다
Twist a part of the world – 구축한 세계의 일부, 또는 룰을 비튼다
Drop a character in there – 인물을 던져 넣는다
Observe the mess – 혼란을 관찰한다
Look back, what you’d do – 돌아본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마지막 질문이, 미래의 이야기를 현실로 연결해 준다. 바로 그 지점에서 디자인 픽션은 질문을 던지는 힘을 갖게 된다.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을 써보자
디자인 픽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행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다. AI는 그 안에서 시뮬레이션 파트너가 되어준다.
픽션을 쓰면서 내가 기대하는 건 멋진 이야기보다, 선명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 앞에서 무작정 두려움이나 불안에 휩싸이지 말고, 물어보자.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 미래에 닿기 위해 오늘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