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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08. 2022

크리스마스 이야기

올해도 산타가 다녀갔다.

 점심 시간, 영상의학과 치프 레지던트와 만나기로 했다. 영상의학과로 진학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 산부인과 인턴이 주선해준 미팅이었다. 영상의학과 전망이 어떤지, 경쟁률이 어떠한지, 어떤 자질과 스펙을 보는지, 의대 4년차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로테이션을 도는 병원마다 레지던트나 어텐딩을 만나 물어보고 다니던 요 몇 달이었다. 마침 레지던시 인터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금, 치프 레지던트는 경쟁률이 점점 높아져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병원에선 올해 세 명을 뽑기로 했는데, 80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다니는 의대에 지원했을 때 12,000명 지원자 중 150명에 뽑히는 것도 마음과 피와 머리가 터지는 경험이었는데, 그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경쟁률이라니 그저 아찔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이 더욱더 복잡해진 부분도 있었지만, 정리가 된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앞으로 한 해를 잘 계획해서 열심히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술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가 남았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한 잔을 주문해 홀짝거리고 있으려니 구수하고 좋았다. 따스한 햇빛 아래 앉아 잠깐 졸다가 다시 레지던트 사무실에 돌아왔더니 산부인과 치프 레지던트가 대뜸 얘기했다.

 '오늘 할 것 다 했지? 요 몇 주 고생한만큼 오늘 일찍 집에 가도 돼. 이제 연말 휴가 시작이잖아?'

 전혀 예상에 없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말이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열심히 해온 것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오늘 이 수술 많이 늦어질텐데 수술 참관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면 집에 가서 공부하건 놀건 하고싶은 것 해.'

 조금 더 골똘하게 생각하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대낮에 병원을 나섰다. 물론 그 오후 수술에 참관하는 것이 소중한 경험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이미 수차례 보았던 수술이고, 무엇보다 금요일 오후의 햇살이 너무 따스했다. 밝을 때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마음 깊이 느꼈던 최근 반 년이었다. 그래서 아직 뜨거운 커피를 들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휴가였다.


 다음 날 아침, 늘어지게 잘 수 있을 터였는데 일곱시쯤 눈이 떠져 마루로 기어 나왔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한참 늦잠을 잔 셈이다. 가만히 앉아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벌써 3학년도 반이 넘게 지났다. 8년의 MD-PhD 과정을 이제 한 학년만 더 다니면 졸업이라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지겨움에 찌든 마음이 갑자기 절대 제 시간에 마무리하지 못할 것 같아 숨가쁘게 조급한 마음으로 치환된 요 몇 주였다. 졸업 요건을 채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레지던시 지원을 계획하고 내년 커리큘럼을 구체적으로 짜야 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음에도 '의사'가 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될 수는 있는지 답도, 끝도 없는 고민과 마주하는 동안 휴가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잘도 지나갔다. 아내와, 보리와 구름이와 맘껏 즐겁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나누고 누려야 할 그 소중한 시간 말이다. 달력을 볼 때마다 크리스마스가 하루씩 가까워져 있었으나 내 머릿속은 계속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집에도 크리스마스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아내 덕분이었다. 12월이 찾아오고 날이 추워지자 아내는 마루에 담요들과 라디에이터를 가져다 두고, 뜨개질을 하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 놓고, 빵을 구워내며 온 집을 겨울의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채워나갔다. 그런가 하면 하루, 하루 병원을 나갔다 올 때마다 집에 자잘하고 예쁘고 귀여운 무언가가 하나씩 늘어나는 것이 눈에 띄였다. 초콜렛이 담긴 바구니라던지, 예쁜 초라던지, 귤이라던지 말이다. 어느 날은 꽃 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공포하더니, 아내는 새벽 여섯 시에 집을 나섰다. 일년에 네 번 정도 있을까 싶은 진귀한 현상이다. 그 날 집에 돌아오자 온 집이 크리스마스의 느낌으로 가득했다. 별의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풀들, 꽃들의 커팅(cutting)들을 사와 크고 작은 풀다발, 크리스마스 리스, 그리고 트리를 만들어 집안 곳곳을 꾸며 놓은 것이었다. 아내는 작년 소중히 모은 도토리 (현금)를 다 썼다고 했다. 어차피 얼마 없었을 텐데 얼마였냐 물어보니 역시 고작 20몇 불이라고 했다. 그의 알뜰함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베이킹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던 아내는 이제 우리집 공인 베이커가 되어, 내가 한 때 베이킹으로 으스대고 뽐내던 영광은 역사가 되었다. 병원에 나가기 시작하고부터는 설거지도 많이 못 하고, 사진도 예전보다 찍을 기회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의사가 되는 것 외엔 딱히 이 집에서의 역할이 없지만, 그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라고 믿는다.


 하여튼, 최근 두 해 동안 아내는 크리스마스 때면 '부쉬 드 노엘'을 준비하곤 했다. 정말 찐득하면서도 촉촉한 초콜렛의 풍미, 그리고 나무토막의 형상이 참 크리스마스에 잘 맞는 케익이었다.

 '올해는 무슨 케익을 할까?'

 아내는 물었다.

 나는 깊게 고민을 할 여력이 없어,

 '올해도 부쉬 드 노엘 정말 좋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음 그렇겠지?'

 아내는 말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 아내가 내놓은 케익은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케익이었다. 아내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화이트 초콜렛 글라사주로 감싼 얼그레이 초콜렛 무스 치즈케익"


 향긋하고 고소한 얼그레이와 초콜렛의 향, 무스의 녹아내리는 폭신한 식감, 크림치즈의 산미, 그리고 달콤하고 쫀쫀한 글라사주. 정말 고급스럽고 크리스마스다우면서 맛과 향의 다채로운 밸런스가 너무나 훌륭한 케익이었다. 단언코 내가 먹어본 초콜렛 베이스 케익 중 최고로 맛있었다. 조각이 하나, 하나 줄어드는 것이 어찌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내와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따뜻하고, 편안하고, 풍족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사치스러울 정도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마다 확실한 목표, 테마, 재료, 그리고 요리를 계획하게 되는데, 올해의 메인 하이라이트는 생와사비와 치즈 퐁듀였다. 크리스마스 이브만큼은 비로소 나도 고민하던 것들, 하던 일들을 다 내려 놓고 크리스마스 상차림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직 조용한 아침. 다른 것은 못해도 아침에 잠시 나가 맛있는 와인을 구해 왔다. 카베르네 소비뇽 한 병, 샤도네이 한 병.

 하루 종일 너무나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 아내 덕에 짧은 겨울 해가 막 저물 즈음 우리는 풍족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올해 메뉴는 다음과 같았다.


- 블랙 트러플 부라타 치즈와 구운 당근을 곁들인 샐러드

- 온갖 생, 구운 야채, 프로슈토, 살라미와 함께한 치즈 퐁듀

- 방어, 연어회, 그리고 직접 갈아낸 생 와사비

- 미트볼

- 라자냐

- 사워도우 빵

- 견과류, 건과일이 잔뜩 들어간 레인코스트 크래커

- 토마토 마리네이드


- 카베르네 소비뇽, 샤도네이

 올해의 피쉬 마켓은 아내와 함께 찾았다. 작년에는 비도 오고, 춥고, 무엇보다 COVID-19 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 때였다. 확진자 수로만 따지면 지금이 훨씬 어마어마하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위험한 COVID-19 종이 돌아다니고 있었던데다 아직 백신도 아직 대중에게 제공되지 않았었다. 거리두기를 고려해 피쉬 마켓에 존재할 수 있는 인원이 세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느렸고, 들어가는 데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었다. 그렇게 한참 기다려 찾았던 피쉬 마켓은 너무나 신기했다. 살면서 이렇게나 신선한 생선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비늘과 맑은 눈을 가진, 이름 모를 생선들. 신선도를 위해 정말 춥게 유지되는 공간에서 COVID-19 때문에 아주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나 기운차게 일하시던, 그 와중에도 내가 뱃살 많은 방어를 찾아줄 수 있냐는 부탁에도 끝까지 고민하며 골라주시던 직원분들, 그 모든 것이 정말 인상 깊었었다. 그렇기에 올해는 아내와 꼭 같이 가고 싶었고, 그럴 수 있었다. 올해도 비도 왔고, 추웠고, COVID-19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참 웃기고 씁쓸한 두 해다.


 올해도 지방이 자글자글한 방어를 구할 수 있어 신이 났다. 아내도 피쉬 마켓의 그 모습에 제법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 다음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어였다. 한 번도 얼린 적 없는 연어는, 우리 눈에는 무엇이 다른지도 잘 모르겠으나 각 개체마다 무게당 가격이 달랐다. 다만, 마리마다 정말 신선하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 붉은 살점과 하얀 지방이 반복되는 패턴과 더불어 살점 안에도 정말로 세밀하게, 기하학적 구조로 세밀하게 지방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터무니 없이 비싼 것도 아니었다. 코스트코에서 흔히 파운드당 $9-10에 살 수 있다면, 피쉬 마켓에선 개체에 따라 파운드에 $11, $13, 그리고 $17로 팔고 있었다. 마침 뼈와 껍질 손질이 다 되있던 파운드당 $13짜리 녀석을 한 번 사 보기로 했다. 생선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피쉬 마켓 입구에 준비된, 김이 폴폴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그 친절함을 마시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작년의 감동이 되살아나도록 방어는 어마어마했다. 탄탄한 생선살에 구석구석 촘촘하게 자리잡은 지방이 씹을 때마다 서걱거리며 녹는 것이 정말 아찔했다. 그런데, 연어는 그보다도, 상상한 것을 한참 넘어서 맛있었다. 내 머리 속에서 연어의 인상은 대단히 강한 맛은 아니지만 고소한 맛이 나고, 식감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생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 온 연어는 마치 방어를 먹는 것처럼 지방이 사각거리면서도 살은 훨씬 더 탱글거렸다. 코스트코에서 사 먹는 연어에서도 딱히 비린내가 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 생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같은 생선의 맛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음에 정말 놀라웠고, 정말 일류 스시집에선 어떤 생선을 사용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피쉬 마켓에 가니 스티로폼 통 안, 물에 동동 해삼같은 모양으로 떠 있는 생 와사비였다. 뭐 얼마나 비싸겠나 싶어 가격도 묻지 않고 별 생각없이 한 덩이를 샀는데, 알고 보니 파운드당 $125불이었다. 세상에. 물론 와사비 한 덩이가 0.1파운드 정도니 다행히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왠지 웃음이 났다.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가 단위 무게당 이렇게 비싼 것 사 본 적 있던가?'

 '그럴리가 없잖아. 턱도 없는걸!'

 '고작 와사비인데 말이지.'

 '그래도 비트코인보다 가치 있지 않을까?'

 '그 때 팔았어야 했는데...'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ㅠㅠㅠㅠㅠㅠ....'


 생 와사비를 갈아내어 한 입 먹어본 순간, 아내와 내 머리 위에 커다란 느낌표가 띵, 하니 자리잡았다. 와사비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이 완전히 변하는 순간이었다. 괴롭게 코가 찡하고 눈물나는 그 날카로운, 익숙한 와사비의 향이 아니었다. 정말 포근하고 느긋한 알싸함이 혀와 코를 자극하면서,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꽃향기와 비슷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 향은 기름진 방어와 연어의 향과 어우러져, 생선의 달콤함을 훨씬 더 배가시켜 주었다. 평소라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와사비를 집어 먹다 보니,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몇 번이나 와사비를 더 갈게 되었다. 비트코인 따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아주 유명한 먹는 방식임에도 우리는 아직 퐁듀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직감적으로 맛있을 것 같다고 느꼈는데도 말이다. 뜨끈뜨끈하고 끈적하게 녹은 치즈에 이것 저것 담가 먹는다니, 훠궈, 샤브샤브같은 그런 음식이 아니겠는가. 아내는 무엇을 담가 먹으면 맛있을지 모르겠다며 호박, 옥수수, 방울 양배추, 토마토, 사과, 감자, 사워도우 빵, 올리브, 치즈, 프로슈토, 살라미 등등 별의별 재료를 준비했다. 무엇을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뜨겁고 고소하며 살짝 꼬릿한 치즈가 입혀진 무엇이건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가장 인상깊었다. 한참 둘이서 호들갑을 떨며, 다섯, 여섯 재료씩 조합해가며 이게 최고니, 저게 최고니 하며, 한참 와인잔을 기울이며 크리스마스 이브 밤을 보냈다.


 둘이서 싱크대 앞에 서서, 얼마나 맛있게 저녁을 먹었는지 또다시 호들갑을 떨며 나는 식기에 비누칠을 하고, 아내는 식기를 씻어냈다. 같이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잠에 빠져드는 아내는 따뜻했고, 숨소리는 사랑스러웠다.

 혼자 살던 시절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종종 떠올리곤 한다. 올해도 그랬듯 연말이라는 시간은 내게 있어 늘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치열한 시간이었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할 마음을 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 이브날도 고작해야 트레이더조에서 냉동 피자를 사다 구워 먹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곤 했다. 그랬던 내 삶에 찾아온 아내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잠깐은 정말 푹 쉬고, 맛있게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며 커다란 선물을 준다. 올해도 산타가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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