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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29. 2021

소세지,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

흥을 불러오는 마성의 조합

 밤 열 시가 넘어가도록 소세지를 뽑아내던 아내가 물었다.

 '이거, 아무리 이 시간이라도 우리 지금 먹어봐야 되지 않아?'

 아내의 소세지에선 익히기도 전에 이미 시큼하고 고소한 체다 치즈의 향, 아리게 매콤한 할라페뇨의 향, 그리고 구수한 돼지고기의 향이 어우러져 나와, 나는 흘러나오는 침을 삼키고만 있던 참이었다.

 '······. 먹어봐야지. 맥주 사 올게!'

 '맛있게 구워 놓을 테니까 천천히 다녀와!'


 아내에게 아주 바쁜 하루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만두피 반죽, 그리고 식빵 반죽을 확인했다. 그리고 직접 돼지고기를 갈아내고, 손질한 파를 섞어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를 하나하나 밀어냈다. 오후 내내 만두를 빚고, 나의 저녁 식사로 돼지 목살을 구워 준 뒤, 저녁엔 오븐을 따끈따끈하게 덥혀 식빵을 구워내었다.

 맥주를 사러 가는 길, 나는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아내가 이 모든 것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하면서도 이상하게 잔잔한 불안이 너울거리던 날이었다. 설거지를 하면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불안은 커다란 파도로 찾아와, 나는 피를 씻어내는 맥베스 부인 마냥 뽀득뽀득 그릇을 씻는 데에 집중을 하며 나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 후 아내가 소세지를 채우는 과정을 도우며 평정을 찾고, 차갑고 습한 밤공기 사이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비로소 불쾌하게 식은땀이 나던 차가운 손발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살짝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둘이 소세지에 짜릿하게 맥주 한 잔 하려니 연애하던 시절의 추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괜히 더 신이 나 안장에서 엉덩이를 들고 페달을 꾹꾹 힘차게 밟았다.




 어린 시절 소세지라고 하면 역시 한 5cm 정도 길이의, 짙은 다홍색을 띤 짜리 몽땅한 '비엔나 소세지'였다. 이마트에 갈 때면 엄마는 항상 '주부 9단' 상표가 달린 녀석을 사 와 네모나게 썰린 양파나 피망과 함께 토마토케첩이 들어간 소스에 볶아 종종 반찬으로 내어주곤 했다. 요즘 말로는 '쏘야'라고 부르는 녀석 말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소세지를 한 입에 넣으면 탱탱한 케이싱에서 지글지글한 맛이 났고, 꾹 씹으면 그 안에서 고기 기름이 스며 나왔다. 학교 급식에서도 소세지 야채 볶음은 항상 인기였고, 다들 소세지를 세 개 가져가니, 네 개 가져가니 하면서 다투곤 했다.


 언제부턴가 이마트에 '수제 소세지'를 팔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짧고, 얇고, 새빨간 소세지가 아닌, 제법 길쭉하고 두툼한 데다 들어간 재료에 따라 색깔도 다양한, 무려 네 개에 10,000원짜리 녀석들이었다. 그땐 그것이 엄청나게 비싸 보였는데, 영업을 종료하기 바로 전, 밤 열 시 사십 분쯤 장을 보러 가면 그 날까지 팔아야 할 것들을 가끔 여섯 개에 이천 원, 삼천 원쯤으로 크게 할인해서 팔 때가 있었다. 그럴 때 한 번씩 사 와 '수제 소세지'를 구워 먹을 때면 내 어린 기억 속 소세지와 다르게 두툼한 녀석을 잘라 한입 가득 우물우물 고기의 식감이 살아있고, 야채의 맛도 나며, 커리라던지 불향이라던지 다양한 향이 나는 것이 신선했다.


 '쏘야'건, '수제 소세지'건, 그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은 술을 마실 수 있게 되고 난 후였다. 기름지고, 짭짤하고, 달달하고, 고소한 소세지는 어찌나 그렇게 술을 부르는지. 그렇게 둘이 술 마시며 돌아다니던 시절, 어느 호프집을 가도 메뉴판에 있는 소세지 볶음은 늘 훌륭한 안주가 되어 주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뽀뽀를 한 날에도, 둘이서 작정하고 10,000mL의 맥주를 마신 날에도 소세지 안주는 상 위에 있었다.


 그 시절 맥주라고 하면 누런, 흔하디 흔한 하이트나 OB 등의 '라거'를 표방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맛있거나 깊은 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리 외의 옥수수나 다른 잡 곡물의 맛이 나는 데다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물을 탔니 안 탔니 말이 늘 많았지만, 꽝꽝 얼어있던 얼음 잔에 담겨 나온 그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나면 잔을 쿵,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크으-!' 하는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이런 아주 밍밍하지만 시원하고 맑은 라거나 발포주들이 제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형 주류 회사들의 독과점으로 인해 꽤 오랫동안 다른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이 들어설 수 없었던 것이 아니꼬웠을 뿐이다.


 수도권 지하철 3호선과 5호선 끝과 끝에 살았던 우린 딱 중간쯤, 종로 3가에서 많이 만나 술을 먹었다. 그런 수많은 곳들 중 우리에게 유난히 특별했던 곳은 종각역 근처 <옥토버페스트>라는 곳이었다. 독일의 브루펍을 모티브로 한 그곳에서 우리는 모둠 수제 소세지나 슈바인학센 등의 독일식 안주에 필스너나 바이젠 등의 독일식 맥주를 마시며 하이트나 OB가 아닌 새로운 맥주 세계에 감탄하곤 했다.

 

 지금이야 IPA니, 사워니, 스타우트니, 도수가 8-10%쯤 되는 맥주를 좋아하지만, 한국의 라거류만 알던 나에게 독일식 맥주는 아주 커다란 신세계였다. 고소하고 묵직하면서 바나나와 정향, 혹은 코리앤더 향이 가득한, 흐릿한 색의 바이젠은 마치 맛있는 빵을 먹는 것 같았고, 필스너는 정말로 맑고 깨끗하면서 그때까지 내가 마셔본 맥주 중에선 처음으로 씁쓸한 '홉'의 향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홉의 종류도 구분할 수 있는 안타까운 인간이 되어 버리게 된 데 영향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라들러, 도수가 낮은 대신 시트러스 향이 가득해 상쾌하고 깔끔한 이 맥주는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마시고 나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평소 호프집 맥주들에 비해 도수가 높은 맥주들을 마시고 나면 제법 취하게 되어서, 그 상태로 앉아서 갈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지하철을 한 시간 정도 타고 각자의 집에 돌아가는 것은 늘 암담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매 술자리의 끝은 우리는 같이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을 하며 마무리짓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추억이 돋는 밤엔 모처럼 추억의 맥주가 먹고 싶은 법이었다. 동네 마트엔 하이트나 OB 맥주를 팔지는 않으니, 예전엔 한국 맥주 대신 '힙한' 외국 맥주를 좋아한다고 허세를 부리며 마시고 다녔지만 사실은 똑같은 미국식 부산물 라거(adjunct lager), 즉 가장 값싸고 흔한 버드와이져 부류의 맥주를 사 가기로 했다. 세상에 아무리 맛있는 음료들이 많아도 코카콜라나 사이다가 압도적인 매출을 내는 것처럼 한국이나 미국이나 세계 어디나 가장 흔한, 부산물 맥주나 발포주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현상이자 한계인 것 같다.

 살얼음이 낄랑 말랑 차가워지도록 잠시 맥주를 냉동실에 넣어 놓은 동안 아내는 소세지를 마저 삶은 후 머스터드를 곁들여 야식 한상을 준비했다.

 나이프를 소세지 표면에 갖다 대자 탱글한 탄력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썰기 시작하니 그 안에 갇혀 있던 고기의 육즙과 잘 녹은 체다 치즈가 흘러나왔다.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보존제나 과한 염분이 첨가되지 않은 소세지에서는 풍성한 돼지고기의 향, 그리고 직접 갈아내었기에 살아있는 식감, 치즈의 고소함, 그리고 딱 좋은 할라페뇨의 매콤함이 전해졌다. 머스터드의 턱 아린 알싸한 상큼함이 침을 고이게 했다.


 아내는 꿀꺽꿀꺽, 차가운 맥주를 마시곤 '캬아!' 하며 캔을 내려놓았다. 이젠 나에 비하면 거의 맥주를 마시지 않는 그지만, 가끔 이렇게 마실 때면 여전히 정말로 맛있게 마신다. 나도 그를 따라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시니 보리차와 옥수수차에 탄산수를 더한 맹맹한 맛임에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소세지 향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 처음 먹는 것 마냥 또 그다음 한 입을 기대하게 했다.


 모처럼 같이 맥주에 야식을 먹고, 살짝 알딸딸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밤 중 정말 충동적이게 소세지를 삶고, 맥주를 사러 갔다 와서 둘이서 알콩달콩, 투닥투닥, 히히덕거리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부분은 그대로 같이 푹신한 침대 위, 폭신한 이불을 덮고 달콤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결혼하길 잘했다. 새삼.




 클라이밍 짐에서 일할 때였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클라이밍 트립을 왔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전 출발 시간까지 살짝 시간이 떠, LA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이 클라이밍 짐에 들른 일행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커다란 짐들을 카운터 데스크 뒤에 맡아 두고,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발에 가까운 금발 머리에 새파란 눈을 가진 그들이 -- 까만 눈과 까만 머리와 까만 피부를 가진 -- 나에게 물었다. 

 'Are you or your family from Germany?' 

 나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십몇 년을 살았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같은 대륙 출신이라는 것이 반가웠는지 들떠서 한참 더 그들 얘기를 해 주었는데, 그 끝에 결국 나는 독일 출신이 아니라고 얘기해야만 했다.

 '사실은 난...'

 그들은 크게 웃었다. 내 억양이 마치 감쪽같이 독일 사람이 영어를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내 마음속에서는 'ㅋㅋㅋㅋㅋㅋ'가 한참 떠 있었다. 


 한 두 번 들어본 얘기는 아니었다. 대학 때 미국에 와서 영어를 제대로 하는 데 집중한 나는 한 음절 음절 견고하게 발음하곤 했는데, 청자 입장에서는 아주 딱딱하게 끊어져 마치 독일어 같다고 했다. 미국에 놀러 와 내가 석사 졸업 논문을 발표하는 모습을 본 여자 친구마저도 나를 독일인이라고 놀리곤 했다. 사실 소세지도, 맥주도, 프릿젤도 오지게 좋아하는 내게 독일인의 혈통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독일어 비슷한 영어로 석사 졸업 발표를 하고, 무사히 석사 학위를 받은 이후 여자 친구와 나는 정말 박봉이었음에도 둘이 열심히 모은 500만 원으로 한 달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같이 경로를 짜던 중 유일하게 의견이 갈렸던 부분은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발하여 남프랑스를 돌 것인지, 아니면 독일 쪽으로 들어갈 것인지였다.


 나에게 있어 자발적 '선택'은 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시험 문제를 풀면서 가장 정답에 가까운 '선택', 즉 이미 정해진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 최선이었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고르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맥주와 소세지를 위해 독일을 경유하고 싶으면서도, 그것이 과연 '정답'인지 알 수가 없어, 여자 친구의 눈치만 계속 살폈다. 그는 내가 열세 살 중학생마냥 '내가 선택한 것에 너도 굉장히 즐거워?' 하는 마음으로 귀찮게 구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가고 싶어 하던 독일을 통해 여행을 하기로 해 주었다.


 그 녀석은 지금 이 날 까지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본다. 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내 마음속에 파고들어 봉인되었던 나의 욕구와 욕망을 탐구하는 일은 정말로 소중한 일이기에, 나는 그에게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콜마르에서의 저녁

 500만 원에 둘이서 한 달 유럽 여행, 사치스러울 수도, 궁상맞을 수도 있는 액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그 돈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이미 사치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비공식 신혼여행이었던 그 여행이 우리에게 있어 아주 소중하고 풍족한 추억이 되어 준 것만은 분명하다.


 각 지역의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좋아했지만, 우리는 슈퍼마켓이나 동네 빵집 등을 찾아 끼니를 준비하는 것 또한 굉장히 좋아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것저것 사다가 아내는 숙소에서 식사를 차려 주었고, 이는 경비도 아끼면서 더욱 충만한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콜마르의 마트에서 산 소세지와 야채, 이전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산 Leffe 맥주, 그리고 그 이전 도시, 파리에서 사 두었던 깜빠뉴와 함께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여태 함께 했던 여행에 대해, 그리고 또 다음 날 우리가 경험할 것들에 대해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부르쯔부르그(Würzburg)의 비어가든

 처음에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갔을 때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물론 멋졌지만, 이미 프랑스에서 봤던 교회 주변의 마을 모습인데다 그 화려함은 상대적으로 덜했고, 빵은 프랑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맛이 없었다. 괜히 독일로 오자고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 인식을 바꿔준 것은 바로 맥주였다.

오른손엔 필스너, 왼손엔 헤페바이젠

 찾아간 독일 마을마다 존재했던 비어가든에선 물보다도 싼 가격에 커다란 맥주 한 잔씩 내어주곤 했다. 와인이 기본인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바이젠과 같은 밀맥주 한 잔, 씁쓸하고 시원한 필스너 한 잔을 양 손에 들고 번갈아 마시고 있으려면 세상 뭐 있나 싶었다. 종로의 <옥토버페스트>에서 마셔 보았던 그 맥주들의 채도와 선명도가 몇 배로 높아진 느낌이었다. 투박하지만 왠지 너무나 맛있는 짭짤하고 구수한 프릿젤, 기름지고, 고소하며 달달한 소세지에 맥주가 그렇게 끝도 없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자 친구와 처음 만난 독일 아이

 내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여자 친구는 난데없이 옆 테이블의 꼬마 아이와 놀러 갔다. 서로 통하는 언어가 없음에도 어쩜 그리 잘 노는지, 결국 나도 동참하여 시소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고, 평행봉 위에서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렇게 세상 모든 아이들과 동물들과 친해질 수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아마 또다시 푹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아내가 벽장 안에서 내 추억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학부 시절, 졸업 사진도 아니고 어느 과목이 끝날 때쯤 교수가 주선하여 수강생 모두 같이 찍었던 사진이었다. 그 교수는 정말 천재이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수업이 모두 끝난 이후 바베큐 파티를 열어 모두가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그 사진에 롤링페이퍼마냥 메세지를 남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곤 했다. 그 과목을 1등으로 끝을 내고 그 교수님의 지도 하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지금 날이 오게 될 줄은 사실 몰랐다.


 그 사진에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적혀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자'에 대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감자를 좋아했던 내가 감자에 대해 예찬했던 만큼, 심지어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감자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라고 적어주는 놈들도 있었다. 다 같이 카페테리아에 가서도 나는 늘 프렌치프라이 건, 해시 브라운이건 감자를 하루도 빠짐없이 식판에 담았었고, 기숙사 앞 패스트푸드점에 단골이 되고 나서는 그들이 팔고 남은 감자튀김을 나눠주곤 했다.


 그렇기에 여자 친구와의 유럽 여행 중 벨기에는 짧게 머물렀던 것 치고 인상에 남았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건너와 버스에서 내렸을 때에도, 다시 프랑스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오르기 직전에도 우리는 그 앞에서 벨기에식 감자튀김을 먹었다. 아주 두꺼운 감자 막대들이 바삭하게 튀겨져, 여러 맛있는 디핑 소스들과 함께 제공되었다. 같이 팔던 시원한 캔맥주와 얼마나 신나 하며 먹었던지.




 소세지를 만든 그 다음날 오후, 아내는 감자튀김과 소세지를 해 주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감자튀김과 소세지, 유럽 여행을 하면서도 자주 먹었고, 이 동네에서도 데이트를 하면서 종종 먹었던 어마어마한 메뉴의 조합이었다.

 지글지글 구워낸 아내의 수제 소세지, 그리고 부글부글 튀겨낸 아내의 감자튀김.


곁들여진 트러플 마요, 페스토 마요, 머스터드. 정말 고소하고 입맛을 확 당기게 하는 소스들.


 빠르게 절여낸 사워크라우트. 상큼하고 묵직하면서 아삭한 식감의 양배추가 소세지와 감자튀김 사이를 파고든다.


 '감자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소세지의 육즙과 탱글함, 그리고 감자튀김의 바삭함과 고소함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또 이다음엔 어떤 소세지를 만들게 될지, 어떻게 감자를 튀겨 낼지, 어떤 소스를 더 곁들일지 얘기를 나누며, 손은 바쁘게 감자튀김과 소세지를 집어 먹었다.


 나의 추억과 마음, 영혼이 담겨 있는 소세지와 감자튀김, 아내는 또 어떻게 나를 뭉클하고 행복하게 할까 늘 궁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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