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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ul 02. 2021

김치 맥주

얼큰하게 시원한

 박사 과정 동안 즐거웠던 부분 중 하나는 학회(Conference)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과 생각을 나누고, 내가 하는 일이 쓰잘데기 없는 삽질이 아니라는 위안과 자신감을 얻는 것도 아주 중요했지만, 한편으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도시의 모습을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신선한 쉼, 그리고 즐거움이었다.


 2019년의 가을, 아직 곧 닥칠 어마어마한 COVID-19라는 재앙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때였다. 나의 지도 교수님이 내 멱살을 붙잡고 이런저런 논문을 쓰도록 한 덕에 나는 한 달 사이에 학회 세 개를 돌며 내가 하는 연구에 대한 발표를 할 수 있는 정말로 감사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 한 학회는 "Lubbock"이라는, 들어본 적도 없으며 어찌 발음하는지도 모르는 텍사스의 작은 도시에서 주최되었다. 물론 파리라던지 베네치아라던지 누구나 알만한 멋진 도시에서 학회가 열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뜬금없는 동네를 알게 되는 것도 제법 즐거운 두근두근한 일이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진 외딴 촌구석에서 자랐다.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를 그런 동네 속에서, 마찬가지로 존재해도 그만,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나라는 개인도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성장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들만의 동네,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여튼, 학회에 가기 위해서는 당시 일하던 클라이밍 짐의 내 주말 시프트를 커버해줄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고맙게도 에이버리(Avery)가 선뜻 내 시프트를 가져가 주었는데, 정말로 공교롭게도, 그가 "Lubbock" 출신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도시에 대해 물어보았다. 무엇보다, 대체 이 도시 이름은 어떻게 발음하는 것인지.


"[루!-박]? [러-박!]? [루-박!]?"


 에이버리는 한참을 웃으면서 절대로 거기 가서 그렇게 발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놀랍게도, Lubbock은 [러-빅]으로 발음되었다. 영어는 정말 멍청한 언어다.

 러빅은 처음 가 보는 텍사스, 그 넓디넓은 주 안의 굉장히 조그마한 대학 도시였다. 대학 주변만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되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옛날부터 자리를 지키던 구도시의 모습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러빅의 물가는 대학가 바로 근처만 벗어나도 정말로 저렴했다. 전반적으로 모든 게 커다랗다는 명성이 자자한 텍사스의 이미지답게, 이 모든 것을 시켜도 $15 정도였다. 또띠아 다섯 장에 볶은 멕시칸 밥, 치즈 잔뜩, 까르네 아사다, 아보카도, 할라페뇨, 나초칩 잔뜩에 사워크림과 께소(치즈), 사워크림, 핫소스, 체다 치즈... 멕시칸 스타일 음식이 텍사스 스타일과 섞여 더욱더 푸짐하고 자극적으로 재탄생한 텍스멕스 (Tex-Mex)의 본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동양인이 흔치 않은지 나보고 어디서 왔냐며, 반갑다며, 케익은 그저 덤으로 줬다. 그 당시에는 배가 불러서 다시 걸어 돌아오는 길조차 너무 힘들었지만, COVID-19 이전, 동양인이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마냥 여겨지지 않던 그 시절이 아주 그립다.

 학회가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 나는 내가 찾아간 도시의 브루어리에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늘 그렇듯 가장 값싼 항공편을 찾아 새벽 한 시에 비행기를 타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아침 아홉 시에 러빅에 도착해서, 나는 곧장 브루어리를 찾았다. 브루어리는 내가 도착했을 즘 막 영업을 시작했고, 스태프는 이 반가운 또라이는 뭔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그 커다란 브루어리 안에 아침 열 시쯤 혼자 앉아 맥주를 고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여러 잔을 맛볼 수 있도록 플라이트를 구성하려고 세심히 메뉴를 들여다보던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피클 사워' 맥주였다. 


 '피클? 진짜로 피클?'

 하고 나는 바텐더이자 브루어이자 사장인 그에게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어제까지는 블랙베리 사워였는데 마침 잘 숙성된 것 같아서 '피클 사워' 맥주를 오늘부터 서빙한다고 했다. 피클은 러빅을 비롯해 텍사스의 자랑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LA에서 왔다는 나에게, 아마 몽키시에도 이런 맥주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긴가민가하면서 먹어본 피클 맥주는 이상하게도 아주 맛있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무려, 조만간 찾아온 푸드트럭에서 텍스-멕스식 감자튀김과 타코 한 개를 주문해 건네주면서 같이 먹어보라고 했다. 오 맙소사,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 짭짤하고 기름지고 달달하고 고기고기한 텍스-멕스 음식에, 상큼하고, 살짝 쌉싸름한 피클 향이 녹아든, 얼음같이 차가운 맥주는 정말로 찰떡궁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음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기름 지글지글하게 구워낸 녹두전 한 입에, 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 한 모금 가득 들이마시는, 바로 그 기분.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치열한 학회 일정이 이어졌다. 전날 동네를 한참 돌아다니며 백인이나 히스패닉이 대부분으로 동양인은 손에 꼽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대학 안에는 중국인, 인도인을 대표로 동양계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Lubbock"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을 '[루!-복]'이라고 발음했다. 그들의 터전인 동네의 이름을 아직도 모를 정도로 본인의 연구와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대단한 것인지, 우스운 것인지 마음이 복잡했다.

 일정이 끝나고 길을 나섰다. 


 러빅은 놀랍게도, 바로 싱어송라이터 '버디 홀리(Buddy Holly)'가 나고 자란 동네였다. 내가 버디 홀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밴드, 위져(Weezer)를 통해서였다. 'Buddy Holly'는 'Say it ain't so'라는 명곡이 담긴, 명반 'Blue Album'의 수록곡 중 하나였는데, 대체 '버디 홀리'가 무엇인가 찾아보니 포크와 락, 그리고 싱어송라이터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절했던 뮤지션이었던 것이다. 그를 기려 러빅은 '버디 홀리' 길을 만들었고, 그 주변으로 많은 뮤지션들을 탄생시킨 라이브 클럽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그중 유명했던 블루 라이트 클럽에 찾아기로 했다. 학회에 참석한다면서 멍청하게도 쪼리 한 짝만 신고 가서, 이미 온 발에 물집이 생긴 채였지만, 반창고를 잘 붙이고 한밤 중에 50분을 걸어서 블루 라이트로 걸어갔다.


 아직 뮤지션들의 공연이 시작하기 전, 클럽 안에는 네, 다섯 명 정도의 사람밖에 없었다. 그들과 바텐더들의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미드에서나 볼 것만 같은 풍경 속, 모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백인뿐이었으니, 그도 그럴 만도 했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척을 하며 나는 IPA 한 캔을 달라고 했다. 냉장고가 아닌, 얼음 한가득 담긴 통에서 바텐더는 맥주를 하나 꺼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캔을 따 내게 건네주었다. 텍사스의 IPA도 제법 괜찮았다.


 조만간 뮤지션들이 스테이지에 올라 제 맘껏 노래를 하다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사실 이들이 밥 딜런과 대단한 차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 같이 멋지게 노래를 했다. 밥 딜런 마저도 버디 홀리가 죽기 며칠 전, 그의 공연을 보며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이들이 엄청난 뮤지션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곧 클럽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나는 이미 두 번째 맥주를 마신 후였다. 옆에 있던, 청바지에 셔츠, 커다란 벨트,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이가 자기가 한 잔 사겠다며 말을 건네었다. 그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고 물었다. 나는 버디 홀리의 음악을 좋아해 왔고 학회 때문에 이 동네에 올 기회가 생긴 김에, 꼭 여기를 와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이런 외지인은 본 적이 없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굳이 소개를 시켜 주는 것이었다. 술 먹은 아저씨들은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다 음악이 멈췄다. 

 모두에게, 노래를 하던 이들에게까지도, 잔이 따라졌다. 

 보드카 샷 하나, 그리고 그놈의 피클 주스. 이게 바로 러빅의 전통이란다.

 정말 어이가 없어 낄낄대며 잔을 비웠더니, 독하고 쨍한 알코올 맛 사이로 피클 주스의 맛이 제법 기분 좋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새벽이 깊어 가도록 이 텍사스 아저씨들은 계속 내게 맥주와 위스키와 보드카를 사 주었다. 거기엔 모두 피클 주스가 담겨 있었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지 물었다. 걸어서 50분쯤 걸린다 그랬더니 미쳤냐면서 택시를 불러 주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내일 아침에 바쁠 텐데 술이나 빨리 깨라면서 맥도널드에서 치킨 버거와 맥플러리를 사 주었다. 미친놈들 같은데 너무나 친절해서 아직도 고맙고 웃기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시절이 참 그립다.


  그렇게 텍사스에 다녀온 이후로부터 나는 늘 생각했다. 피클과 맥주가 잘 어울린다면, 아니, 김치와 맥주가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아내가 물김치를 담을 때면, 꼭 그 국물을 무난한 라거와 섞어서 마셔보곤 한다. 물김치와 맥주의 탄산이 더해져 너무나 청량감이 있고, 상큼하면서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전이란 전은 다 떠오르는 그런 맛이다.

 이건 나만의 소중한 레시피라고 생각하던 도중, 기어코 이 맥주가 출시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도깨비어'라는 아주 귀여운 이름을 가진 브루어리의 도전이었다. '김치 사워'. 

 생강과 고춧가루를 더하고, 김치 유산균을 더해 발효시킨 맥주였다.

 생각한 맛 그대로였다. 유산균과 생강이 가져다주는 상큼한 첫맛에, 깔끔하고 청량감 있는 뒷맛.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매콤한 맛이 서서히 밀려왔다. 물김치와 맥주가 조화롭게 섞인 맛이었다. 나한테도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이미 더 유능한 누군가가 이를 구현했음에 안타깝다고 너스레를 떨며, 나는 꿀꺽꿀꺽, 이 '김치 사워'를 마셨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김치의 맛이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내의 물김치를 맥주에 진득이 부어서 마신다. 술의 진화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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