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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니 Sep 19. 2021

짤막한 이야기들

다른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




#수박_잘썰어주는_멋진오빠 (feat.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남편과 연애할 때 가장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물론 프러포즈받았던 때가 가장 기억이 나고 그다음은 그가 내 자취방에 와서 수박을 썰어주던 날이 떠오른다. 아빠 아닌 남자가 썰어주는 과일은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수박은 자취생이 먹기 정말 어려운 음식이다. 요즘은 쥬씨에서 수박 도시락이 나와서 쉽게 사 먹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수박을 반 잘라 판매하는 곳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계절과일을 좋아해 여름이면 수박을 달고 살아왔기에 늘 수박이 먹고 싶었는데, 자취방 냉장고는 수박 한 통을 사면 다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던 중 구 남친/현 남편이 수박을 사다 썰어줬다. 아빠 아닌 남자가 수박 썰어주는 건 처음이라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때부터 그는 매해 여름이면 나에게 수박을 썰어줬다.



 결혼하고는 안 해줄 줄 알았는데 올해는 재택근무 중에 남편이 수박을 썰어 방에 가져다줬다. 이 남자 감동이다. 




#피자_대첩



 주말을 맞이해 한강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식사 메뉴는 피자로 결정했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늘 싸움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될까?


-남편: 한강 주변에 피자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잘 아는 동네에서 주문해가자

-나: 아니, 나는 식은 피자 말고 바로 나온 뜨거운 피자 먹고 싶은데...

-남편: 근데 우리는 그 주변 어디에 피자집이 있는 줄도 모르고 헤매야 하잖아

-나: 미리 주문해두고 네비 찍고 가면 되잖아!

-남편: 자기는 왜 운전하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

-나: 따뜻한 피자 먹고 싶다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야?


 의견 대립 중에 중간이 있다면 맞춰지지만, 한 명이 완전히 포기해야 할 땐 여전히 싸움이 된다. 서로 고집부린다며 싸우다가 결국 한강공원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를 픽업했는데,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좀 져주면 안 되나?





#잠만보



 세상에 태어나서 만난 사람 중에 잠이 제일 많은 사람이 내 남편이다. 오늘도 오후 2시까지 자고 일어나서 밥을 해 먹고, 또 자러 들어가서 저녁 7시가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책 한 권을 다 읽고 샤워를 하고 아파트 단지 산책도 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나는 보통 날씨가 이렇게 좋으면 나가고 싶던데, 그래도 아무 말도 말아야지...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많이 잘 수 있을까 궁금해 죽겠어도 아무 말도 말아야지...




#신혼여행시절_만행




 오늘 어떤 책을 읽다가, 체코에서 체스키크롬프까지 차를 몰고 여행을 했다는 내용을 보고 우리의 신혼여행이 떠올랐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체코에서 렌트를 해 체스키크롬프를 거쳐 오스트리아 할슈타트까지 무려 6시간 운전을 해서 갔다. 그날은 비가 정말 많이 내렸고, 남편이 된 지 10일 차쯤 된 그는 구글맵에 의지해 낯선 땅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수석에서 깊은 잠을 잤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가 말하길 폭우가 쏟아지는데 정말 잘 자더라며, 나중에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헷갈릴 때는 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고. 



 아무튼 내 기준 3시간 정도 꿀잠을 자고 일어나니 할슈타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 문득 그날이 떠올랐고, 뒤늦게 무심한 자신을 반성했다.




#소소한_일치



 삼청동에 갈 일이 있는 남편에게 "소품점에서 검은색 곱창 머리끈 좀 사다 줘!" 주문했는데, 기가 막히게 맘에 드는 걸 사 왔다. 물건을 고르는 취향이 비슷한 편이라 그가 이상하다는 것은 나도 이상하고, 내가 예쁘다는 것은 그도 예쁘다고 하기에 심부름을 시키고도 큰 걱정이 없었다. 이럴 땐, 우리가 참 잘 맞지 싶다.






<다른 사람과 살고 있습니다>는 매주 일요일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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