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당신에게 쓸게
남편이 우리 집에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 아빠는 예비 사위에게 결혼을 허락하며 한가지 당부를 했다. 지금도 그 말이 평온한 결혼 생활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부부사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의 당부는 "서로가 싫어하는 걸 하지마라"였다. 살아가며 서로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은 물론 좋지만, 오랜기간 웃으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싫어하는 걸 안해야한다는 거였다. 상대가 싫다는 일이 내가 기를 쓰고 꼭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라면 합의점을 찾아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을 싫다는데도 계속해서 늘 싸움이 된다.
보통 결혼생활을 시작하면 서로 다르게 지내온 생활 습관 속에서 부딪히는 부분은 놀랍도록 많다. 예를들면 드라마에서 주로 나오는 양말 좀 뒤집어 벗어놓지마! 하는 사소한 것들이 그렇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지 말라고 했는데 빨래하는 사람의 고충도 모르는 다른 가족은 계속해서 양말을 뒤집어 벗는다. 싫다, 하지 마라, 생각이 없냐 잔소리와 싸움이 반복되다가 결국은 싫다고한 쪽이 지쳐서 포기하는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제일 슬픈건 서로 원하는 생활 방식이 다르다는 것 보다 결국에는 포기한다는 지점이다. 포기는 즉 무관심이다. 당신에게 더이상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결정한다는 거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가 싫다는 걸 하지 않고 있을까 점검해봤다. 내가 남편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은 밤 늦게 군것질 하지마라,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을 켜두지마라, 가정보다 일을 앞에 두지 마라, 대화 중에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술 먹고 대리운전 부르지 마라(대리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아예 집에 차를 두고 가라는 의미에서), 젖은 수건을 그대로 빨래통에 넣지 마라 등으로 사소한 가사에서부터 그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게 나열할 수 있다. 그 중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 불 켜두지 않기, 술 약속 있는 날 차 안가져가기, 사용한 수건을 말린 후 빨래통에 넣기를 실천하고 있다.
나는 어떨까?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도 남편이 나에게 하지 말라고 한게 없는 것 같다. 딱 하나 떠오르는 것이 연애시절 본인의 차에 타게 되면 조수석에서 유리 앞까지 발을 올리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달라고, 나는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그게 너무 싫다기에 그 후로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차를 바꾼 그가 차문 안쪽에 스크래치 나는게 싫어 내리고 탈 때 좀 조심해줘 정도의 요청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완벽한 인간이라서 싫은게 없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를 정말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걸까. 혹은 나보다 차에게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합의점을 찾은 우리의 경우에도 아직 100% 합의하지 못한 건 대다수의 커플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그 녀석, 바로 담배다. 그가 다니던 회사에 입사한 내가 신규입사자로 소개되며 쓴 자기소개서에 제일 싫어하는 것은? 항목을 채우던 것이 바로 '담배'다. 그는 회사 게시판에 붙여진 나의 자기소개서를 보고 그날로 담배를 끊겠다고 했다. 담배 문제로 수도 없이 실랑이를 벌이는 친구 커플을 가까이에서 보았기에 나는 그와 부딪히고 싶지 않아 애초에 금연을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끊어 준다기에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한민국 소재의 회사들은 점처럼 연결 된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작나 싶을 정도로 한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으로 다 연결이 되는데, 남편의 새직장도 그랬다.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지만, 그가 이직한 회사에서 담배를 핀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그 후로 지금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생략하겠다. 다만, 더이상 담배 문제에 상관하지 않을테니 원하는대로 하라는 나의 말에 그는 5월 1일자로 다시 금연을 선언했다. 앞서 말했듯 내가 그의 문제에 에너지를 쏟지 않겠다는 사실상의 포기 선언이 두려웠던거다.
남편은 날 위해 본인의 게으름을 포기하지는 않지만(ep.1 참고)날 위해 본인의 기호는 포기한다. 수차례 시도하고 노력했던 금연이 그렇고 뒤이어 이야기할 떡볶이가 그렇다. 그는 며칠 전 편의점에서 사다 먹은 떡볶이가 입에 딱 맞는다고 좋아했다. 방부제 덩어리인데 그걸 왜 먹냐고 먹고 싶다는걸 두 번이나 못 먹게 했다. 그러다가 또 얘기를 꺼내기에 먹고 싶으면 사다 먹으라고 허락 했더니 신이나서 나가 사오는 남편. 저렇게 좋아하는걸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안하고 참는 사람은 세상에 이 사람밖에 없다.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사이 갈등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배우자가 싫다는걸 내가 계속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길 추천한다. 그리고 꼭 합의점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