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사의 가슴 속에 쏟아지는 ‘사도헌장’
내가 몸담은 이 필드는 정년이 보장된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자칫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음을 나는 일찍 감지했다. 권태에 몸부림치는 나 자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그 상황을 예방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학교에서 수업도 업무도 더더욱 잘하고 싶은 욕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부장이 된 그해 여름방학 때, 나는 1정 연수를 받고 드디어 1급 정교사가 되었다.
본청에서 통보된 시험성적을 확인한 교감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고, 만점 가까운 점수를 득한 나를 교무실 식구들과 함께 박수로 축하해주셨다. 남 앞에 서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내가, 자원하여 연수생 전체 대표단도 맡고, 연수를 운영하는 연구사님도 돕고, 임용고시 이후 공부에 손 놨던 몸뚱이를 부단히도 혹사하며 치열하게 공부한 결과였다.
예체능부장을 하던 2년간 내 별명은 행사의 여왕이었다. 체육과 문화예술 관련 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대부분의 학교행사와 시설관리도 내 몫이었다. 특히, 가을 학교 축제를 앞두고는 3개월간 밤 10시까지 홀로 남아 야근을 했다. 50학급의 전교 학생 수는 천 명이 넘었고, 그 수에 육박하는 학부모님 천 명, 교직원 백여 명까지 동참하는 일주일간의 축제 운영을 총괄해야 했다.
신설 학교로 개교한 이래 첫 축제였고, 관련 사례가 전무한 것이 난제였다. 광활한 흰 도화지를 2천여 명 교육 가족의 연대로 채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축제 네이밍부터 슬로건과 비전 제시, 세부 계획 수립부터 구체적인 운영방안 모색, 지원인력 섭외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리에서 나와야 했고, 내 손과 발로 실현해야 했다.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 밖 사람들과 릴레이 미팅을 했다. MOU를 맺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했다. 정말 많은 외부인들을 만났고, 대화를 나눴고, 행사를 준비했다. 간혹 내가 교사가 맞는지 정체성에 의문이 생길 정도였으니, 새로운 도전임은 분명했다.
퇴근시각까지는 협의를 했고, 이후에는 수렴한 내용을 담아 계획서를 만들었다. 고생하는 나를 위해 가끔 선배들이 우리 교실에 들러 간식을 건네거나, 저녁을 사줬다. 뒤에서 독려해준 그 언니들이 없었다면, 나는 중간에 주저앉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피와 살을 갈아 넣은 최종계획서를 교장 선생님께 드리니 이런 계획서는 처음 봤다고 극찬하셨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 모든 교육 가족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아이들의 배움에 연대했고,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해줬다.
그걸로 충분했다.
해냄의 희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고통까지 마취시켰다.
그동안의 고생은 전혀 고생이 아니었고, 맨땅에 헤딩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난제가 닥쳐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는 확신에 몸이 전율했다. 해냈다는 기쁨은 나를 더욱 채찍질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받고 일을 했다.
혹여 우리 부서 계원이 병가나 휴직으로 공백이 발생하면 그 업무까지도 내가 다 백업했다.
나날이 '일도사'로 거듭났고 마냥 즐거웠다.
일을 척척 해내는 나 자신이 멋있다고 느꼈고, 권태가 전혀 생기지 않는 현재가 짜릿했다. 그러나 시간은 유한했다. 내가 할 일을 아무리 잽싸기 잘 처리해도, 업무는 화수분처럼 몸집을 더욱 불려 나갔다. 워낙 업무량이 많았기에 칼퇴근은 있을 수 없었다. 돌봄 업무까지 겸한 후에는, 저녁 돌봄이 끝나는 9시까지 남아서 관리 업무를 했다. 그런 내가 딱했는지, 친한 친구 수정이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쥬야, 우리 일급 6만 원이야. 몸 좀 사려.”
맞는 말이었다. 당시 신규교사 초봉은 180만 원 정도였다. 주 5일제 시행 전이라, 토요일도 등교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 달을 30일로 보고 나누면, 일급은 6만 원, 시급은 7500원인 셈이었다. 참 감사하게도, 친구의 단순한 그 한마디는 열정페이로 급발진 일변도였던 나를 잠깐 멈추게 했다. 그리고 현실을 반추하게 했다.
나는 대학생 때 틈틈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니즈가 높은 학생의 경우 하루 2시간 과외비로 30만 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를 단순히 비교하면 차이가 무려 20배나 된다. 계산이 끝난 순간 마음 한 곳에서 씁쓸한 물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나 쓰라림도 잠시, 이미지 한 컷이 불현듯 떠오르며 마음이 이내 편안해졌다.
졸업식 날 곱게 단장하고 학사모를 쓴 채 찍은 독사진이었다. 교대 교정 가운데 ‘스승의 길’이라 새겨진 상징석 앞에서, 오른손을 힘껏 쥐고 파이팅을 외치던 나였다. 아련한 추억에 휩싸이면서 아까 잠깐 굳었던 마음은 마시멜로처럼 말캉해졌다. 마시멜로 위로 달달한 설탕도 서걱서걱 흩날렸다.
초임교 인사발령통지서를 받으러 간 교육청에서 낭독했던 ‘사도헌장’ 문구들이 설탕처럼 머릿속에 쏟아졌다.
애초에 돈을 바라고 입직한 게 아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 영혼이 좋아하는 일, 내 이성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닌 꿈나무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였다. 이곳에 몸담아 일하는 현재의 행복이 과분할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쏘아 올렸던 위로의 말은 그 이후에도 가끔 떠올랐다. 번 아웃 위기가 닥칠 때면 자연스레 생각이 났다.
적당히 일하자는 ‘보신주의’ '느낌표'가 아니라,
교직에서의 이 행복을 오래 영위하기 위해 건강도 잘 챙기자는
‘자중자애’의 '큰 쉼표'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