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집에 가면 늘 듣는 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인복이 없다는 말이다. 무당은 내게 말한다. 외로운 사주다, 이렇게 외로워서 어떡하냐. 그렇지만 나는 이 정도면 인복이 많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복이 더 많으면 내가 감당이 안될 것 같은데? 나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늘 죽고 싶었던 중학생 때조차도 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선생님들, 동아리 친구들, 후배들, 선배들,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 일본어 수업을 듣던 친구들. 역설적이게도 죽고 싶었지만 혼자였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중3 때 담임 선생님은 내 사정을 듣고서 학부모 면담 대신 내가 같이 살던 친척과 면담을 했다. 물론 친척은 면담 때는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손목의 주름을 따라 예리한 커터칼을 그어댔고, 다행히 흉터는 남아있지 않다. 그걸 선생님께 얘기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 손목을 쥐며 이런 짓은 하지 말자고 하셨다. 간간히 용돈을 챙겨주기도 하고 새 학기에 필기구를 사러 시내에 가자고 하던 선생님. 마음껏 고르라고 했는데도 나는 그 마음에도 한도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볼펜 몇 자루만 손에 쥐었다. 더 고르라는 말에도 고를 수 없었다. 그저 머쓱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 선생님의 당시 나이는 나의 나이보다 훨씬 어렸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친척의 집을 나와서 여자 선배네 집에 살게 된 나는 겨우 숨을 트일 수 있었다. 똑같이 얹혀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밤늦도록 언니와 함께 깔깔대기도 하고 노래를 듣기도 했다. 공부만 안 했지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언니의 모부님인 아줌마, 아저씨는 내게 친절했고, 언니의 두 동생은 나와 서먹하게 지내긴 했지만 배려해 주었다. 낯선 남이 같이 산다고 하는 데도 납득을 했다는 게, 그 어린 나이에 나를 받아줬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다. 모든 것이.
사실은 말이 되지 않았다. 생판 남인 언니네 집에 가서 산다고 하는 데도, 친척은 그저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명절이나 방학 때는 다른 친척 집에 가서 머물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시적이었고 내가 역설적으로 멀리해야 하는 사람들이 가까운 친척이라는 점도 몰랐다.
내가 살던 방은 집이라기엔 방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언니네 집과는 분리된 작은 방이 있고, 다른 통로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으며, 수도와 화장실이 별도로 있었다. 야외와 가까운 수도관이라 겨울이면 꽁꽁 얼어서 아침이면 주변의 목욕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도 행복했다. 물론 외로움과 행복은 별개라 언제까지 사람은 외로운 걸까 고민하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살 수 있었다.
당시에 겨우 기초수급생활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어 수급비로 40만 원 남짓을 받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나의 생활비와 학교 생활에 드는 교재비 등이 있었고,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교복을 살 돈이 없어서 다른 친척에게 말하니 친척들에게 말해서 알아서 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이모들에게 의지하라는 엄마의 말 때문에 끊어내질 못했던 것 같다. 중학교 음악 선생님의 도움으로 브랜드 교복점에서 이월상품을 더 할인받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교복 살 돈이 없다니. 나를 떠맡았던 친척은 이런 것 때문에 나를 실업계 고등학교로 보내려고 했다. 돈이나 벌라며. 나는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는 건 좋아했기 때문에 미술이나 일본어, 한문, 사회문화 같은 것들은 1등급, 전교 1등을 받아야 속이 후련했다. 비교적 다른 친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과목이라 점수가 더 잘 나온 것도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100점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살던 내가 수학여행을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배려해 줘서 10만 원 정도만 내고 가게 끔 하셨는데, 당시 내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 10만 원은 너무 큰 금액이었다. 나는 한사코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아저씨는 수학여행 전 내게 편지와 용돈을 내 방에 남겨놓고 가셨다. 고마우면서도 내가 수학여행을 안 가는 건, 못 가는 건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학여행 갈 돈이 없다고 아저씨, 아줌마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수학여행이 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사람은 나를 빼고도 몇이 더 있었고, 등교해서 공부를 하거나 시간을 때웠다. 실제로 수학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나는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얻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사진을 보내줬고, 다녀오고서 기념품을 잔뜩 안겨주었다. 비슷비슷한 간식거리와 돌하르방 키링을 선물 받아 웃음이 났다.
수능이 가까워 오는 날, 공부를 하지 않던 내게도 수능날은 특별한 날이긴 했다. 한 과목만 최저등급을 맞추면 되는 것이라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장학금을 탈 생각 따위는 일찌감치 접었다. 학교에서는 합격엿이나 떡 같은 것을 돌렸다. 2층에 살던 이웃 아줌마는 내게 수능합격엿을 주셨고, 아줌마, 아저씨 역시 내게 수능을 잘 보라며 선물을 주셨다. 살짝 후회가 됐다. 이렇게 주변에서 챙겨줄 줄 알았으면 공부를 더 할 걸 하고. 수능날에는 친구의 어머니께서 점심때 먹을 도시락을 주셨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 차를 타고 함께 수능장으로 갔다. 이 정도면 인복이 많지 않은가.
내 기억에 관한 한 제일 처음 받은 꽃다발은 아저씨가 주신 꽃다발이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곧 대학생이 될 것이라는 달뜬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받는다는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우리 반에서 제일 처음 꽃다발을 받은 사람은 나였다. 아저씨가 일을 하다 말고 학교로 찾아와 꽃다발을 안겨주셨다.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아저씨의 친구가 우리 학교 선생님이라 물어물어 우리 반을 찾아오신 듯했다. 나는 연합동아리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동아리 선생님들도 찾아오셔서 꽃다발을 주셨다. 꽃다발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않고 있던 내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사진을 찍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학과 동기들, 선배들, 후배들과 함께 잘 놀았다. 정말 끝내주게 놀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난한 대학생, 대학원생이었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놀았던 기억이 난다. 취업을 하고서도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나를 잘 봐주셨고, 이직할 때는 이사 준비를 하라고 하루 전에 짐을 싸라고 하셨다. 짐을 꾸린 그날 갑작스러운 나의 송별회가 이어졌고 한우를 원 없이 구워 먹었다. 선생님들이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했고, 2차로 갔던 단골 카페의 사장님은 내가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고 하자 자주 마시던 티 한팩과 손 편지를 써주셨다. 이사를 한 당일에 만신창이가 된 내가 발견한 그 편지는 한동안 나를 울게 했다. 비록 지금은 이직해서 동료 없이 혼자 일하고 있지만, 같이 일하던 동료들 역시 좋았으니 이게 인복이 없는 것이라면, 인복이 없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