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3 시기였다. 친한 선생님께서 내가 박물관, 미술관에 관심이 있어서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고 하니 민속학과에 수시 전형으로 지원해 보라고 알려주셨다. 당시에는 민속이 뭔지 잘 알지 못했다. 역사 시간에 배운 세시풍속 정도로만 알고 있었달까. 사실 지금도 민속이라는 분야는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하기 어렵다. 그때는 몰랐지, 민속학과에 들어갔다고 하면 민속이 뭐냐는 질문에 시달리게 될지.
당시 나는 서양미술사에 심취해 있었고, 빈센트 반 고흐나 에곤 쉴레, 클림트, 고갱, 르누아르 등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살던 당시에 어떤 평가를 받았건 현재 서양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좋았고, 나는 그저 끌려가듯 스며든 사람이었다. 고3 여름방학이 돼서야 나는 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미술을 해야 한다고 엉엉 울어댔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울면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끝없이 들었다. 왜 내가 미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미술사학과도 아닌 실기를 쳐서 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것도 서양화과로. 지금은 그림도 잘 그리지 않고 있으면서 말이다. 나는 미술관, 박물관에 들어가서 큐레이터가 되고 싶었다.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의 차이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민속학과를 들어가서 갈라질 길이 큐레이터가 아닌 학예사인줄 알았다면 입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민속학과에 들어갔냐면 웃기게도 입시미술이 싫어서였다. 공부하기는 더 싫었다. 민속학과와 서양화과를 저울질했다. 민속학과는 수시 전형에 넣었고, 서양화과는 입시미술학원에서 정시를 추천했다. 홍대 정도로 가려면 재수를 해야 한다고, 민속학과 수시 전형에 합격한 나는 당장 입시미술학원을 때려치웠다. 미술학원에서는 내 가난한 사정을 듣고서 학원비를 할인해 줬고, 친한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학원비의 대부분을 대주셨다. 그런데도 때려치웠다. 민속학과 면접을 보고 돌아온 날에 선생님의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머쓱하게 내 심정을 전했다. 정말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막상 민속학과에 입학을 하고 나자 나는 첫날부터 나서서 과대가 되었다. 예상처럼 술자리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고3 때 공부하고 대학에 가서 놀라고 하시던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놀 수야 있지만, 고3 때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이 많았고, 과제의 양이 버거웠다. 그렇게 높은 커트라인의 학과가 아니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걸 요구한다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민속이 뭔지를 알기도 전에 민속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장구 쳐?”, “굿 해?”, “동동주 마셔?”, “거기 나오면 뭐 해?” 등등의 질문에 시달린다. 자존심 상하게도 나는 아니지만 풍물을 치는 친구들이 있고, 굿을 실제로 하진 않지만 무속신앙을 비롯한 민속신앙에 대해 배우고, 동동주만 마시는 게 아니라 막걸리에, 맥주에, 소주를 궤짝으로 마신다. 이런 질문들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1학년이 끝나있다.
전공 기초과목 수업 첫날에 전공 용어를 이야기하며 다 알고 있지 않냐는 교수님, 교우들이 한자를 잘 못 읽자 의미 전달이 안 되지 않냐고 윽박지르던 교수님, 다양하게 혼내던 교수님들이 있었다. 물론 다정한 교수님들도 있어서 어른은 어른이구나 와닿았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지자 술 먹고 선배들에게 불려 다녀야 하는 이 나날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하고, 불 꺼진 기숙사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는 친구들과도 놀아야 했으니 시간은 더 부족했다. 공부는 왜 안 했냐고? 다른 과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민속학과는 단합을 좋아하고 학과 행사도 많고, 가을에는 마을로 민속조사를 가는 추계답사도 다녀와야 했다. 아르바이트도 포기할 수 없었다.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내게 어퍼컷을 날린 것은 교수님들의 말씀이었다. 박물관은 이미 포화상태가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기술을 살려 기자나 문화기획자 같은 다른 직업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아, 이러려고 입학한 것은 아니었는데, 큐레이터가 되려는 내 꿈에서 멀어졌나? 물론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석사 학위를 따고 경력인증기관에서 2년간 일하고서 정 3급 학예사 자격을 받는 방법과 준학예사 시험을 치러 5년의 경력을 쌓아 준학예사가 된 후 각 기관에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어 면접을 보고 합격하는 방법도 있다. 또 각 지방자치단체의 시험 기준을 충족하여 학예사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도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나는 대학교 3학년 무렵에 겨울방학 동안 시립박물관에서 약 2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했고, 졸업 후에는 다른 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국공립박물관에서 2년 정도의 경력을 쌓았다. 이곳은 고고학 유물이 많은 곳이라 고고학에 무지한 나는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나 박물관마다 경우는 같아서, 이직을 할 때마다 박물관에 적응하고 유물 공부를 새로 해야 했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박물관에서 11개월 정도 일을 했다. 왜 이렇게 경력이 짧냐고? 박물관은 계약직이나 공무직으로 근로하는 경우가 많은데, 계약직의 경우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서 11개월 이하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곳은 6개월만 뽑기도 하니 안정적이게 일하기에는 썩 좋은 곳은 아니다. 계약직이 2년 이상 일을 하게 되면 공무직으로 전환해줘야 하는데 이 또한 기관에서는 좋아하지 않아서 전환되기도 어렵다. 아예 공무직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낫겠지만, 이 또한 쉽지 않고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주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의 나는 박물관에서 떠나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경력을 아예 틀어서 변호사사무실의 법률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런 걸 보면 정말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큐레이터를 꿈꾸던 내가 돌고 돌아 법률사무원이 되다니. 민속의 곁을 떠나온 지도 몇 년이 되었다. 내 기억 속의 전공지식은 옅어졌어도 민속학과를 다니면서 겪은 나날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적어도 내겐 전 애인을 잊는 것만큼 어려운 게 전공에 관한 잡다한 것들을 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