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도 이전에 조사했던 제보자의 부고를 맞닥뜨렸다. 이름도, 거주하던 마을도 동일했다. 제보자의 이름 역시 조금 특이한 편이라서 겹칠 일은 없었을 것이니, 나와 선배들이 함께 조사한 그 제보자가 맞다. 일을 하던 나는 갑작스러운 부고에 충격을 받았다. 엄청나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알던 분이 돌아가셨을 때의 슬픔이 있다. 그런데 그걸 나눌 대상이 없었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까 이 분을? 카톡으로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기억하냐고, 이 분이 돌아가셨는데 너무 슬픈데도 연락할 데가 없어서 언니한테 연락했다고. 언니는 슬퍼했을까, 그냥 그렇구나 했을까.
이토록 얄팍한 관계라니. 사람에게 한 번 정을 주면 크게 앓는 나는 며칠을 슬퍼했다. 돌이켜보면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수많은 제보자들 중에서 내가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건 몇이나 될 것이며, 그분들은 나를 기억할까.
추계답사를 갔을 때 나는 후배들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 길목에 있는 어느 한 집에서 김장 김치를 맛깔나게 담그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부녀회장님 댁이었다. 당시에 우리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투가 거칠었고, 큰 소리를 내셨고, 웃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녀회장님은 정이 많은 분이었다. 우리 보고 어딜 가냐고 호통을 치기에 이쪽으로 지나가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우리에게 김장김치와 수육을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다. ‘츤데레’ 같은 분이시라고 하면 이해하려나. 앉은 김에 우리는 각자가 맡은 파트에 관한 질문을 연신 물어봤다. 그런데도 귀찮은 기색 없이 답변을 해주셨다. 그러곤 우리에게 김장 김치를 한 보따리씩 나눠주셨다.
나중에 또 오겠다는 말을 하자 “바빠서 오겠어? 못 보지 못 봐”하며 씁쓸해하셨다. 그 말 그대로 다시 찾아뵙지 못했다. 연락처라도 받아놓을 걸, 그래서 안부 인사라도 가끔 할 걸, 종종 찾아갈걸. 이런 마음은 현실에 치여사는 생활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다. 제보자들은 대체로 연세가 많은 편이다. 마을 회관에 가면 70대는 아직 어린 편이라서 다른 어르신들이 드실 요리도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80대는 돼야 ‘노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제보자들은 80대가 많았다. 제보자들이 지금도 살아계실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나는 제보자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냥 잊고 살면 될 것을, 미련하게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