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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강 Oct 07. 2024

오늘도 낯선 집에 갑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낯선 집을, 낯선 곳을 전전하다 끝이 났다. 엄마 친구 집, 내 친구 집, 친척 집, 찜질방, 수많은 모텔, 쪽방촌, 원룸촌 등을 돌아다녔다. 기억에는 잘 남아있지 않는 그 많은 곳들. 이 중에서 엄마와 살았던 쪽방과 원룸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그나마 안정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당분간) 더 이상은 낯선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 내가 며칠씩 묵었던 곳들은 어느 마음 둘 데 없이 ‘방문’하는 곳들이었다. 더 이상은 이사가 아닌 이상 낯선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더니, 아이러니하게도 밥 먹듯이 낯선 집을 가야 했다. 다 민속학과 때문이다.     


민속학과는 드라마 <악귀>, 영화 <파묘> 등을 통해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악귀>의 극 중 김태리의 아버지와 오정세가 귀신을 보는 민속학과 교수로 등장해서 민속학 관련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우리 과 교수님들 역시 자문에 참여했다는 것을 드라마 자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민속학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김태리 때문에 봤지만 말이다. 물론 드라마 제목인 ‘악귀’처럼 민속 이야기보다 귀신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극 중 민속학과 교수들이 두 명이나 귀신을 보는 인물로 나와서 드라마 <악귀>로 인해 민속학과 교수님들은 이제 귀신이 보이냐는 질문에 시달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깔깔깔.      


국립안동대학교에 있는 민속학과는 전국 유일의 민속학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민속학과를 마지막으로 학과는 사라지고 문화유산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학원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립안동대학교에 다행히도 민속학과가 남아 있다.      


나는 2012년에 현지조사를 처음으로 참여했다. 2012년에 민속학과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얼추 나온다. 하하. 당시 민속학과에서는 추계답사라고 해서 안동에 있는 마을을 선정하여 조를 짜서 인원을 배분하여 현지조사를 하곤 했다. 처음이라 멋도 모르고 선배를 따라다녔던 게 기억이 난다. 물롤 그전에도 현지조사를 다녔을 텐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기록의 중요성이 이토록 중요한 일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현지조사를 가면 3박 4일 정도 마을회관에 묵게 되는데 열몇 명의 인원이 복작복작하게 그 안에서 지낸다. 마을 배정을 받기 전 최대의 관심사는 마을회관의 화장실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일반적인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져 있는데, 마을회관의 화장실은 흔히 ‘푸세식 화장실’이라고 불리는 재래식 화장실이 많기 때문이다. 제발 수세식 화장실이기를 바라며, 조장에게 화장실은 어떤 화장실이냐고 물어댄다. 왜 이렇게 화장실에 집착하냐면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저녁에 하루의 답사 브리핑을 하고 나서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내가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나를 마시는 건지 헷갈리게도 되는데, 술병이 나면 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장실이 재래식 화장실이다? 정말 끔찍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경험을 해봐서 안다. 그래서 간혹 조사를 다니다가 재래식 화장실이 아닌 일반적인 화장실이 있는 집을 발견하면 다른 조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보통 정석적인 현지조사라고 하면 조사지에서 1년은 묵으며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한다. 문화인류학 수업에서는 사계절은 나며 보내야 그곳의 민속을 잘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대학 학부생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으니 추계답사는 실질적으로 현지조사를 ‘찍먹’해보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어르신들은 나라에서 ‘조사’라는 명목 하에 인권유린을 당한 기억이 있어서 실제로 조사를 나갈 때는 “마을 공부하러 왔어요”나 “어르신들 이야기 들으러 왔어요”라고 한다. 그러나 자주 조사지로 선정된 마을, 이를테면 학교에서 가까운 마을 같은 경우에는 어르신들께서 먼저 “조사하러 왔네”하고 본인 살아온 이야기를 술술 해주거나, 어느 파트가 조사했을 법한 이야기를 계속 말씀하시곤 한다. 노련한 제보자는 어떨 때는 곤란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동안에 마을의 모임 장소인 마을회관을 어르신들은 이용하지 않으신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이 있다 보니 평소처럼 이용하시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을회관에서 먹고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서 조사를 나가고 점심이면 들어와서 밥을 먹고 다시 조사를 나가고 저녁 무렵 마을회관으로 들어와 자료 정리를 하며 브리핑 준비를 한다. 그리고 또 교수님과 브리핑을 하고 며칠간 반복한다.   

   

며칠을 묵으면서 각자의 파트를 나눠 조사하는데, 보통은 조장이 마을 개관을 조사하고, 구비문학, 일생의례, 민속종교, 의식주, 생업 등과 같은 파트는 다른 파트장과 파트원이 짝을 이루어 조사한다. 마을의 민속은 슬프게도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더 기록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마을회관에서 밥을 지어먹어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니 인원이 다 모였는지 확인하는 것도 일이다. 모두가 다 점심을 같이 먹지는 않는다. 특히 식생활 파트의 경우에는 어르신들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조사를 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할머니들은 밥은 먹고 다니냐며 끼니를 챙겨주셨다. 핫플레이스인 할머니댁에 가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조사한 이야기들은 다른 파트장에게 필요하면 공유를 하기도 한다. 조사를 하다가 나오는 것들을 보면 다른 파트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 당연히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얄밉고 싫은 사람에게는 가르쳐주기 싫은 고약한 마음이 든다. 제보자의 사진이나 인적사항도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는다.      


어떤 날은 할머니들이 호박죽을 끓여드셨는데 내가 밥을 아직 못 먹었다고 하자 냉면 그릇에 고봉으로 퍼주시고는 한 번을 더 주셨다. 어떻게 낯선 사람에게도 이런 정을 베풀 수 있는 걸까.      


마을 어르신들께서 낯선 이의 방문에도 흔쾌히 맞아주셔서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경계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다. 현지조사를 하는 어려움은 자신이 맡은 파트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준비를 잘 못했을 때 직면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물어야 할 때의 당혹감, 다시 질문이 돌아왔을 때 못 알아들었을 때의 곤혹감.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 안 되는데 조사 경험이 적었던 나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서 구멍 숭숭 뚫린 조사자료를 브리핑 해댔다.      


현지조사의 어려움은 수 없이 많다. 마을의 지리를 익혀야 하고, 제보자의 인적사항과 얼굴, 집을 외워야 하고, 제보자와 라포형성을 해야 하고,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을 지리를 익히는 것이야 며칠을 마을을 다니다 보면 그래도 익혀진다. 제보자의 인적사항과 얼굴은 사진을 찍어두고 조사자료를 보다 보면 나중에는 ‘ㅇㅇ할아버지’, ‘ㅇㅇ댁 할머니’라는 식으로 익혀진다. 집을 외우는 게 생각보다 복병일 수 있지만 이것도 어떻게든 된다. 어차피 이 글은 마을 답사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더 알고 싶다면 『민속조사의 현장과 방법』과 같은 책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낯선 사람과 라포형성을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기는 더더욱 어렵다. 전수조사에 가까운 조사를 해야 한다면 더더욱 한 사람에게 할애할 시간은 짧다. 한 교수님께서 “자네들이 한 게 정말로 라포형성이 됐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라포형성은 그리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라포형성이 됐다고 하기에 제보자와의 관계는 너무도 얄팍했다. 친구나 지인만 해도 그럴 것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추계답사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일단 힘이 든다.      


현지조사에서 특히나 여성 조사자가 직면하는 어려움들이 있다. 바로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술 취한 어르신에게 뺨을 맞을 뻔한다거나, 어르신이 미지근한 소주를 마시라고 권하거나, 할머니가 계신 집에 가서 조사를 했는데 당신의 아들이 계속 때린다는 소리를 한다거나 하는 가정폭력을 하는 가장이 있는 집에 조사를 간 경험 등이 나를 비롯해서 누군가들은 있다. 또 이장이 시제가 끝나고 나서 맥주를 마시러 가지고 추근덕 대면서 악수를 청해 오는 일이 있곤 한다. 물론 손을 주무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서 조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는 둘 이상 다니는 것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좋은 것 같다. 파트장과 파트원의 합이 잘 맞아서 파트장이 질문을 하면 파트원도 질문을 하고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며 조사를 하는 것이 베스트이다. 파트장과 파트원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파트장은 추계답사 때 조사한 자료를 글로 쓰고, 파트원은 조사한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한 파일을 채록해서 풀어내어 파트장에게 넘겨준다. 혼자서 민속 조사를 하게 되면 파트장과 파트원의 역할을 둘 다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을 답사하다 보면 여긴 어디? 난 누구? 하는 상황을 많이 겪게 된다. 그곳이 그곳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골길도 자주 다니다 보면 익숙해진다.  마을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금줄이 둘러진 나무를 찾아가기도 한다. 어떤 나무는 주변에 막걸리가 뿌려져 있고 막걸리 통이 나뒹굴고 있기도 했다.      

조사를 하는 파트에 따라서 당연히 조사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나의 경우에 종교 파트를 자주 조사했기 때문에 마을에 교회가 있다면 교회로, 절이 있다면 절로, 무당집이 있으면 무당집에 가야 했다. 다만 마을에 있는 무당(굿을 못하고 간단한 치성만 해주는 점쟁이에 가깝다) 할머니를 찾아가야 할 때는 본인이 신을 받은 것을 숨기느라 잘 이야기를 해주지 않기도 한다.      


조사가 끝난 뒤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이게 뭔가 싶어 진다. 이게 뭔가 싶던 그 사람이 나예요. 전체 마을답사를 가면 조사를 하고 나서 저녁이면 교수님과 브리핑을 하고, 교수님 빼고 학부생들끼리 저녁과 술을 먹는다. 이걸 며칠 반복하고 나면 추계답사가 끝이 나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마을에 추가 답사를 가야 한다. 전화번호를 알아놨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기도 하고, 추계답사 때는 조사하지 못한 항목들을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트원인 당시 파트장 언니와 함께 마을에 버스를 타고 추가답사를 갔다가 중간에 잘못 내린 경험이 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다행히 운 좋게도 지나가던 경찰차가 있어서 뛰어가서 붙잡아 사정을 말했더니 마을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마을회관 앞에 경찰차를 떡하니 주차를 하는 바람에 인근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뒷좌석 문을 열려고 하자 열리지 않았다. 아차, 경찰차는 뒷문을 안에서 열 수가 없지. 경찰관분들이 문을 열어주셔서 내릴 수 있었다. 감사를 표하자 쿨하게 떠나신 경찰관분들 감사합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컹컹 짖는 개들도 있고, 목줄이 없이 따라오는 개들도 있어서 종종 위험할 때가 있다. 마당에 들어가야 하는데 큰소리로 짖어대는 개가 있으면 그 집은 조사하기에 꺼려지게 마련이다. 내 경우엔 그렇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애교라도 부리는 고양이가 나타나면 냅다 가방을 벗어던지고 고양이부터 만지려는 사람. 그것도 나다.      


어르신들께 택호를 언급하며 누구 댁 할머니집에 가려면 어딜 가야 하냐, 어느 어르신댁에 가려면 어떡해야 하냐고 물을 때 곤란했던 건, “저쪽 위에 가면 있다”, “어디 파란 집 뒤에 가면 있다”라고 뭉뚱그려 말하신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다. 모르는 시골 마을에서 어떻게 찾겠는가?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물어 물어서 찾아간다. 시발 까라면 까야지.      


어느 때는 그 마을에 대해 엄청 잘 아는 어른이 있었는데, 그 누가 가도 말씀을 안 해주시고 혼만 내고 다른 데나 가라고 소리 지르셨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내가 갔더니 성씨를 물으시더니 같은 본가라고 내게는 친절하게 구셔서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불러와 수월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 본가에 감사한 날이었다. 마을에서 성씨는 중요하다.       


마을은 참 평화롭고도 시끄럽다. 간혹 마을회관에 도착했더니 칠순잔치를 할 때도 있었다. 출장 뷔페에 출장 가수가 정신이 없었지만 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어르신들이 잔치니까 많이 먹고 가라고 낯선 이인 나를 배려해 주셨다. 할머니께서 따라오라고 하셔서 집으로 따라간 적도 있다. 집 위치를 알아야 찾아뵙고 또 질문할 수 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빈다고 하시던 어르신, 아마도 가족들의 평안을 빌 것이다. 여러분도 시골집에 가면 성주신이나 정화수 같은 게 있는지 살펴보시길.     


마을에 당나무가 있던 터가 남아 있다고 해서 찾아가기도 했다. 터만 남아도 찾아간다. 그것이 민속학도니까. 언제까지 동제를 지냈고 어떤 식으로 지냈는지, 수종은 무엇이었는지도 알아낸다. 터 주변에는 금줄이 쳐있었다. 일반적으로 당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김없이 자료 정리를 하고 보고서를 써야 한다. 이때 공부를 더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 더 잘하지 못한 게 아쉽다. 물론 지금도 학부생 때나 대학원생 때처럼 하라고 한다면 할 자신이 없지만 말이다. 기말리포트 마감이 12시까지 라면 12시까지 제출하는 사람이 나다. 기말리포트 쓰는 걸 너무 싫어했는데 문화재수리연계전공을 해놓고서는 왜 대학원에 갔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냥 공부는 하러 가고 싶었다. 에잇 그냥 독학이라도 할걸! 어디 공부만 하겠는가. 나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신다. 놀기도 엄청 놀았다. 친구들아 보고 있니?     


물론 모두가 추계답사를 가는 것은 아니라서 학과 내부에서 큰소리가 인적도 있다. 답사를 가게 되면 수업도 빠져야 하고, 민속학과 수업을 제외하더라도 연계전공을 하거나 복수전공을 하거나 교양수업을 듣는 경우에는 답사를 간 사람과 안 간 사람의 학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답사를 가게 되면 조사한 뒤에 파트장은 글을 써야 하고, 파트원은 채록을 해야 하고, 추가 답사도 들어가야 하는 등 소요되는 시간이 많다.      


울면서 리포트와 보고서를 쓰던 때를 기억하며, 지금은 낯선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음에 안도한다. 그래도 민속 조사는 재밌었는데 말이지. 보고서만 쓰는 게 아니라면 또 추계답사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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