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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강 Oct 14. 2024

처서매직을 믿으세요?

여름이다. 역대급 폭염이 온다는 말은 하루 이틀 사이에 들려오는 말이 아니다. 매년마다 역대급 폭염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탓에 사람들은 ‘역대급’이 붙으면 안 믿는다는 말까지 하기도 한다.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진 요즘 그걸 넘어서 지구가 사람들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건 아닐까, 인간들이 눈치 없이 살아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일주일 남짓을 제외하고 비가 온 해도 있었고, 올해는 폭염이었다가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고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런 여름도 처서(處暑)를 지나면 사그라들고는 했다. 


처서는 24절기의 하나로, 고등학생 때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잠깐 배웠을 세시절기 중 14번째 절기이다. 입추가 지난 뒤 양력 8월 23일 정도인데, 올해는 8월 22일이었다. 처서가 지나면 시원해져 가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처서매직(處暑magic)’이라고 부르곤 한다. 마법처럼 사라지는 더위라니. 그러나 올해는 처서매직이 통하지 않았고, 처서도 이만하면 노력했다는 식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처서가 지났는데도 덥다. 거기다 가을 폭염이라니? 가을과 폭염이 함께 할 수 있는 단어인가? 옛날처럼 세시절기에 따라서 세시풍속을 다 지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시풍속을 행하는 게 아니라 세시절기 자체가 변하다니. 기후위기가 정말 심각하다.


민속학과에서는 세시풍속 수업 시간에 세시절기와 함께 절기마다 한 민중들의 풍습을 공부했다. 사실 내가 싫어하는 과목이기도 해서, 나는 추계답사 때는 제발 세시풍속 파트를 맡지 않기를, 민속종교나 일생의례를 맡기를 바랐다. 세시풍속 시간에 공부했던 김택규 선생님의 『세시풍속의 연구』 책은 조사를 제외하고 한자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책이라 공부하는 데 시간이 들었다. 또 『동국세시기』 역시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한자를 알고 있더라도 전공서에 나오는 한자는 또 다른 법 아닌가. 한 번은 수업 때 발표를 하던 학우가 한자를 잘못 읽어서 교수님께 혼이 났다. 그 학우만이 아니라 수업을 듣는 사람 모두가 혼이 났다. 휴 그래도 영어로 수업을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을까. 차라리 어린이책이라도 읽고 먼저 공부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공부하려고 했으면 했을 텐데, 나는 어떻게든 공부를 안 하려고 노력했으니 세시풍속 수업이 싫어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 친해진 언니들은 한 학번 위의 선배로, 세시풍속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세시풍속 듀오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내가 말이다. 어떻게 또 둘이 친한지 신기하기도 했다. 언니들은 청명, 한서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언니들 둘 다 당연히 이런 의미에서 이름을 가진 건 아니다. 하하. 세시풍속 듀오라고 부르면 질색팔색을 하던 언니들이 떠오른다. 


청명 언니와 나는 1학년 때 추계답사 파트장과 파트원으로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청명 언니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멋도 모르고 준비도 잘 안 해간 나와 어리바리였을 2학년의 언니. 언니는 늘 민속학과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배신자였는데, 그런 언니가 1학년을 데리고 글을 써야 했다니. 생각하면 살짝 눈물이 난다. 나 역시 그러했으므로. 1학년은 똘똘하면 다행이지만 대체로 정말 모르기 때문에 채록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다. 조사를 하고 나면 녹음 파일을 녹취록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이게 참 드럽게도 안 들린다. 조사하는 입장이면 내가 조사를 했고, 메모도 했으니 얼추 들리기야 하는데 남이 조사한 건 잘 들으려 해도 안 들린다. 그러니 녹취록에는 대체로 (……) 같은 말줄임표가 들어가고 종종 (언니 죄송해요… 잘 안 들려요…)가 들어가며 ‘ㅠㅠㅠㅠㅠ’ 또한 등장한다.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파트원이 채록을 하면 파트장이 그걸 토대로 글을 쓰게 되는데, 이런 노답인 상황일 때는 파트원이 다시 채록을 하거나(그래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파트장이 새로 채록을 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청명 언니가 채록을 새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 최선이었으니까. 그래서 언니에게 미안하면서도 2학년이 되어 파트장이 됐을 때 내 파트원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ㅠㅠㅠ투성이와 말줄임표 투성이인 채록본을 받았을 때도 괜찮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더 다시 채록해 주겠니?


한서 언니와는 듀오인 청명 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가 역시나 추계답사 같은 조가 되어 더 친해졌다. 대학생인 나는 너무도 게을렀기 때문에 나만큼이나 게으른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든 미루는 사람이 한서 언니였다. 나와 함께 추가 답사를 다녀오며 경찰차를 탔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답사를 함께 다니고 마을 고양이들을 양껏 만지고 재밌게 놀며 조사했다. 


대학생들은 각자 나름으로 바쁜데 우리 역시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 와중에 한껏 게을렀던 나는 추계답사 원고를 시작만 하게 되는데 나와 상황이 똑같던 것이 한서언니였다. 나는 언니를 계속 의심했다. 그럴 리 없다, 언니가 나만큼이나 밀렸다고? 나만큼이나 원고를 안 썼다고? 계속 의심했다. 언니는 결백한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만큼이나 솔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래도 어찌어찌 기한에 맞춰서 무사히 비루한 원고를 써서 냈고, 발표까지 무사히 마쳤다. 한서 언니는 게으르지만 머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순서 바뀌면 안 됨)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던 언니는 얼마 안 이따가 한방에 붙어버려서 언니가 언제 준비했나 놀라던 내가 떠오른다.


민속학과에서는 이렇게 쓴 추계답사 원고를 엮어서 두꺼운 책을 낸다. 1년에 한 권씩의 책이 나오게 되는 셈인데, 민속학과를 다니면 책 3권의 공저가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추계답사로는 책 3권을 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추계답사가 마을 답사를 하여 책을 내는 방식에서 일반 사학과 답사 방식으로 바뀐 걸로 알고 있으니 현재는 아마 학부 수업에서 책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추계답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커플이 탄생하기도 하고 친한 선후배를 사귀기도 한다.  같은 면의 리 단위로 배정된 조원들은 ‘ㅇㅇ리의 자식들’이 된다. 물론 마을과는 협의되지 않았다. 추계답사 앞풀이, 추계답사, 뒤풀이 술자리에서 ‘ㅇㅇ리를 위하여!’라고 한다거나 ‘역시 ㅇㅇ리지~’라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답사를 가는 것과 글을 쓰고 발표를 하는 일과는 또 다른 일이라서 문제가 발생한다. 학과 역시 작은 사회라서 누군가의 글을 표절을 한다거나,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도 나타난다. 발표 때 제발 교수님이 그 부분의 질문만을 하지 않길 원할 것이다. 어떤 학우의 경우에는 거짓말로 써서 원고를 작성했는데 그 부분을 교수님이 질문을 하셨는데, 다행히도 그 마을에서 있는 사실이라 무사히 넘어간 경우도 있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싸움이나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다들 한 강의실에서 모여서 글을 쓰기도 한다. 물론 미리 써놓고 완성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미리미리 할 수 있었다면 민속학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는 다들 추계답사 원고 발표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기말고사나 기말리포트를 써야 하는데, 민속학과의 기말리포트는 대체로 (역시나) 마을 조사를 가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추계답사 원고와 여러 전공 수업의 기말리포트를 병행하는 건 정말 힘들다. 내 경우에는 문화재수리연계전공을 들었지만(그렇다 나 역시 대학원에 진학은 했으나, 학부 때 연계전공을 한 배신자다) 현장 실습과 답사를 병행해야 해서 또 다르게 힘이 들었다.  


늘 역대급으로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밥을 먹지 못한 채 오렌지 주스를 두고 연명하던 때도 있었다.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게으름이 한몫했다. 나는 그냥 하는 게 안 되는 사람이었다. 더 잘하고 싶어서 아이러니하게도 미뤄댔다. 나 미루기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기말리포트가 12시까지 마감이라면 마감 전까지 쓰다가 겨우 제출하는 사람이 나다. 이 버릇은 대학원을 휴학하고서 고쳤지만 여전히 마감은 힘들다. 마감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난 아니다. 가끔은 학교를 다니던 때가 그리워질 때가 있지만 그건 아마도 좋은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교수님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답사는 즐겁지만 리포트를 쓰고 채록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 이건 고통스럽다. 


여름은 늘 덥고 더웠지만 앞으로의 여름이 올해만큼은 아니길 간절하게 바라본다. 적당히 덥고 적당히 비 오는 날들이 그립다. 우리의 세시절기는 앞으로 바뀔지도 모르지만 그에 따라서 세시풍속도 변화해 갈까? 아니면 절기의 날짜만 바뀔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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